[상상사전] '벽'

▲ 김은초 기자

얼마 전 심부름으로 누나가 강사로 일하는 목동 학원가에 간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학교도 학원도 쉴 때였지만 목동은 예외라는 듯 학원 주변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런데 학생들이 많은 동네라 시끌벅적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길거리마저 독서실처럼 조용했다. 학생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손에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영어단어를 외우는 듯했다. 듣던 대로 뜨거운 목동의 교육열을 느낄 수 있는 단면이었다.

학원가 맞은편 아파트에는 어릴 적 친구가 산다. 마당 딸린 3층짜리 주택에 살던 친구네 가족은 늦둥이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목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떤 데 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집 앞에 가보니 넓은 주택에서 오래된 아파트로 옮긴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집은 좁아졌는데 집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학원가 주변은 낮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높은 학원건물들을 둘러싼 모습이다. 제주도처럼 한라산을 중심으로 수많은 오름이 분포한 생김새와 닮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낮은 봉우리들의 시선은 일제히 중심에 있는 높은 학원건물로 향한다. 교육열이라는 이름의 욕망이 모여 화산 꼭대기로 분출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목동은 입시를 위해 존재하는 동네 같다. 

‘명문 학군’으로 손꼽히는 지역의 분위기가 다 이렇다. 강남 8학군과 양천구 목동, 노원구 중계동은 ‘맹모지교’의 상징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 학원까지 가까이 있어 학생들의 이동을 최소화하고 근처에 편의시설도 충분하다. 한 동네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도록 ‘밀집’된 지역이다.

이런 학군과 학원가를 중심으로 모여든 교육열은 주변 지역 집값을 떠받치는 힘이다. 2000년부터 10년 동안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강남 3구와 양천구, 노원구 순으로 높았다. 2010년 자사고 설립 이후 순위가 달라졌다가 최근 정부가 정시 확대, 자사고 폐지를 발표하자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비싼 집값 때문에 자연스레 어느 정도 ‘있는 집’ 아이들만 모이는 지역으로 굳어졌다.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과 형편이 다른 사람을 볼 일이 없는 아이들은 거주지를 격차로 인식한다. 강남은 비강남을 구분하고, 목동은 신정동과 선을 긋는다. ‘앞 단지’ 목동과 ‘뒷 단지’ 신정동을 구분하고, 연립주택은 같은 목동으로 묶는 것조차 거부한다.

▲ 정부가 공공임대 주택을 대규모 공급하는 내용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자, 주변 집값을 떨어뜨린다는 등의 이유로 임대주택을 반대하는 '님비(NIMBY)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6월 세종시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는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으로 묶이면 '아파트 이미지 저하가 우려된다'고 반대하면서 논란이 됐다. ⓒ MBC

<강남 만들기, 강남 따라하기>에서 이향아·이동헌은 거주자들이 차별화의 경계를 높게 세우는 ‘담장 치기’ 전략으로 공간적 서열화 유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몇 가구 정도만 모여 사는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는 중세시대 ‘성’처럼 넓은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닫힌 도시를 열어라>(The Gated City)에서 에이번트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다른 도시에 따로따로 살게 한다면, 이는 기회를 제약하고 소득 불균형을 고착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시는 계층과 소득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모듬살이터’다. 학생들도 어릴 때부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며 자라야 한다. 동식물도 다양한 종류가 뒤엉켜 살아야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한다. 한 종류만 있다면 병충해나 바이러스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학생들은 버스가 목동을 빠져나오기 전 모조리 내렸다. 집과 학원을 오가는 동선은 목동 안에서 맴돈다. 몇 정거장을 지나 동네가 바뀌자 퇴근하는 중국동포 노동자들이 버스에 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버스를 채운 이들의 계층이 확 바뀌었다. 외부와 벽을 쌓고 살아도 결국 매일 버스라는 같은 공간에서 연결된다. 목동 안에서만 맴돌던 학생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오동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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