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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사회적 책임’을 공론화하자

기사승인 2020.07.27  21: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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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비발언대]

   
▲ 김성진 기자

종교를 사회 토론의 영역에 포함할 수 있나? 어디까지 토론의 영역이고 어디서부터 토론의 영역이 아닌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가던 지난달 3일 톰 코튼 상원의원은 <뉴욕타임스>에 ‘군대를 투입하라(Send In the Troops)’는 칼럼을 실었다가 비난을 샀다. 그동안 억눌린 인종차별 문제에 공분한 시위인데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콕 집어 ‘폭력’으로 단정함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흐렸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사과문을 내고 그 칼럼을 지면에는 싣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표현의 자유’ 토론에 불을 지폈다. CBS 뉴스 앵커를 지낸 제프 그린필드는 “단순히 의견이 다르다고 거부하는 오피니언면(op-ed)은 그저 내-오피니언면(my-ed)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시위대를 ‘폭도’라 부른 칼럼도 실어야 사회적 토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CNN 정치 평론가 스머코니쉬는 “논의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면서 어디까지 토론의 대상으로 허용할지 미국 사회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 송파구는 이날 오후 2시 기준으로 관내 사랑교회와 관련된 확진자가 11명 추가돼 총 16명이 됐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한국 개신교의 토론 문화는 얼마나 성숙했나? 예배 중단 문제는 한 번도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각 교회의 결정에 그저 의존해왔을 뿐이다. 정부의 집회 자제 요청에 일부 개신교회는 종교의 자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서울 송파구 사랑교회 등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다시 논란이 일었지만, 종교 소모임의 경우 방역수칙 의무화 조처도 24일부터 해제됐다.

종교가 결부된 문제는 공론화하기 어렵다. 코로나가 한창 확산하던 지난 3월에도 일부 개신교회는 현장예배를 고수했다. 성도들 입 속에 소금물을 뿌린 은혜의강교회가 그랬고, 많은 대형교회들이 서울시 지침을 거부했다. 취재를 위해 3월 22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전광훈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사랑제일교회에 찾아갔다. 일본 파송 선교사가 오고, 서울 전역에서 성도들이 몰려든다는 사실은 그때 알았다.

   
▲ 사랑제일교회가 지난 3월 22일 정부의 종교집회 자체 방침을 어기고 현장 예배를 강행해 점검 나온 공무원, 경찰 등과 충돌했다. ⓒ 김성진

당시 예배당 입구로 향하는 오르막길 왼편으로 드문드문 탁상이 펼쳐져 있었다. 차양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이 ‘청년’ 하고 붙잡더니 서명을 부탁했다. 4.15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사전투표를 거부한다’고 종이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한 아주머니는 “중국인들 붙들어 와서 선거 시킨대”라고 말했다. 정중히 거절하고 취재를 계속하는데 그 아주머니가 뒤따라오더니 다짜고짜 내 등짝을 때렸다. 그는 “아무래도 스파이 같다”면서 “기자들이 숨어 다니면서 질문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돌아서서 길을 내려가는 내 뒤에 대고 아주머니는 이렇게 외쳤다. “그렇게 양심 없이 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천벌 내린다.”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기가 힘들다. ‘신을 믿는다’ ‘믿음이 있다’는 건 맹목적인 면이 있다. 이성과 논리에 기반한 우리 사회의 토론 영역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한 종편방송이 ‘종교인 과세’를 주제로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초청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종교인은 ‘성직자는 근로자가 아니다’라며 과세에 반대했다. 그 근거가 <요한복음> 10장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란 구절이다. 목자는 소명에 따라 일하는 사람이므로 사회가 정한 ‘근로자’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토론이 이뤄지려면 근거의 옳고 그름을 참여자 모두가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종교적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성과 믿음이 부딪히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들다.

한국 개신교는 ‘진리’가 공론화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예배 중단을 촉구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교회에 다닌 나도 개신교가 주장한 ‘진리’가 공론화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들은 개신교가 진리만을 추구하는 부동(不動)의 종교인 것처럼 말한다. 사실 개신교는 사회의 요구에 잘 적응해온 종교다.

성탄절로 지켜온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그 날짜를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고 정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지정될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였다. 로마인들은 우리 ‘동지’에 해당하는 12월 25일을 태양절로 지키고 있었다. 기독교도 무리 없이 로마 사회에 수용되려고 태양절을 가장 큰 종교 절기로 지정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성서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예수가 태어난 날이 3월 중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개신교 진리의 핵심인 예수의 신성(神性)도 사람들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이다. 기독교가 막 로마 국교로 지정된 2세기의 일이다. 아리우스 파를 중심으로 니코메디아 교회는 예수가 피조물이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 몸에 신적 능력이 결합했다고 받아들였다. 지금처럼 예수가 하나님, 성령과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진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325년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됐다. 공의회가 채택한 니케아 신조는 예수의 신성과 더불어 부활절 날짜 등 새로 정한 기독교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종교라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진리도 결국 공론화를 거쳐 결정된 것들이다.

한국 개신교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개신교 성도들이 서로를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라고 많이들 불러서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도 교회에 무슨 직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평신도를 직분으로 구분하는 개신교는 없다. 한국 개신교가 정서에 맞게 도입한 체계다. 미국 뉴욕주의 양철희 목사는 7살 어린이가 자신에게 그냥 ‘찰리’(Charlie)라고 부르는 걸 듣고 당황했다고 한다. 한국은 목사의 권위가 높아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도 사회의 문화에 따라 변화한다. 지금 교회들이 당연하게 실시하는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십일조도 한국 개신교만의 특징이다.

종교의 진리 중에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또는 토론에 따라 결정된 것들이 많다. 한국 개신교가 현장예배를 불변의 진리라며 논의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개신교는 사회적 토론의 영역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래야 반개신교 감정을 극복하고 모두의 교회로 거듭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에 공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가 주문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더 필요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셋 중 둘이 개신교나 목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개신교에 관한 여론이 악화한 상황에서 지금처럼 외부 전도에 몰두하는 것은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지금은 공적 책임을 다해 개신교에 관한 부정적 여론을 돌려놓을 때다. 개신교 성도들 중에도 현장예배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 존재를 느껴왔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 속과 등 두들기는 아버지 손길에서 하나님을 느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나님을 가리킨 말이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꼭 예배당에 가야 예수와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들 숨결이 바이러스를 옮긴다는데 꼭 예배당에 모여야 할까?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가 있고 신을 만든 게 아니라, 신이 있어 종교가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신이 먼저이니 꼭 사람이 만든 종교에 의존할 이유는 없다. 한국 개신교는 공론의 영역으로 복귀해야 한다. 사람들 합의에 따라 공적 책임을 질 때 비로소 한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 : 김지연 PD

김성진 기자 ksj94977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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