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영화 ‘리틀 포레스트’

“그게 아니고… 배고파서 온 거야”

갑자기 고향에는 왜 왔냐고 묻는 친구 은숙(진기주 분),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은 배고파서 왔다고 답한다.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지만 혜원은 정말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어찌 보면 시시한 이야기다. 도시 생활의 염세적인 기억은 종종 혜원을 괴롭혔지만, 서사에서 갈등을 찾기는 어렵다. 그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음식만 영상에 담긴다. 영화든 소설이든 갈등이 있어야 서사가 진행된다. 갈등과 역경을 이겨내거나 처절하게 패배하는 과정에 사건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순제작비 15억 원의 저예산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3월 비수기 개봉에서도 150만 관객을 모았다.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한 이 영화가 나름대로 선방한 요인은 무엇일까?

▲ <리틀 포레스트>는 관객들에게 ‘소확행’의 기쁨을 선사했다. © 메가박스

“최고의 안주는 알싸한 추위 속에 술을 같이 마실 사람”

영화 속에 갈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혜원과 재하(류준열 분)가 단둘이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목격한 은숙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한다. 은숙이 재하를 좋아하고 있다고 혜원에게 고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었다. 요즘 영화라면 자연스레 삼각관계를 형성할 만도 한데, 이 영화는 낮은 방지턱을 넘어가듯 유유히 갈등을 빠져나간다. 술자리에 합류한 은숙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또 다른 갈등도 있다. 은숙이 회사 부장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자 혜원이 그만두면 편하지 않으냐고 반문한 것이다. 단단히 화가 난 친구에게 혜원은 직접 만든 크렘브륄레를 선물한다. 감독은 장난처럼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지만, 둘은 봄날 살얼음을 녹이듯 쉽게 갈등을 해결한다. 친구니까 가능한 일이다.

▲ 혜원은 막걸리를 만들면서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메가박스

이처럼 고향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혜원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 말고도 사람 냄새와 숨소리가 필요했다. 고향은 혜원의 결핍을 채워주는 ‘인정’(人情)의 보고다. 그에 반해 도시는 어떤가? 혜원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남자친구에게 도시락을 싸다 바치며 온갖 정성을 들였다. 그런데 남자친구에게 그 정성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혜원은 친구들에게 자기는 부담스럽다고 너스레 떠는 남자친구를 발견한다. 혜원이 느낀 상실감은 사람에 관한 그리움을 증폭시켰다. 도시는 그리움을 채워주는 공간이 아니라 떠나고 싶은 상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혜원이 시골로 돌아오며 느꼈던 배고픔, 어쩌면 이 배고픔은 ‘사람이 고프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으로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온 거야”

고향 집에서 혜원은 남자친구에게 스스로 돌아온 것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이별을 통보한다. 도시에 두고 있던 미련의 끈을 마저 놓아버리는 순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가 상기된다. 도시에서 푹 절여져 도망치는 혜원의 모습은 순진하고 무모한 나비를 닮았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서울은 지향하는 공간이었지만, 정작 겪어본 도시는 청무 밭이 아니라 거친 바다였다. 그래서 혜원은 고향을 떠나지 못한다. 서울로 돌아간다더니 가을 갈무리만 오부지게 한다는 재하의 발언에도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혜원에게 도시는 더는 이상향이 아니다.

혜원의 시골 생활은 유유자적 또는 안빈낙도와 어울린다. 조동일은 문학의 미적 범주를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 우아미 네 가지로 나누면서, 우아미의 대표 작품으로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꼽았다. 갈등보다는 조화와 순응을, 새로운 삶을 향한 지향보다는 현재의 삶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혜원도 그렇게 고향으로 서서히 자신의 뿌리를 옮겨갔다.

“지금 혜원이는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주심기는 더는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다. 아주심기를 하고 나면 겨울 서릿발에도 뿌리가 말라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진다. 혜원은 스스로 고향에 아주심기를 했다. 도시가 결핍으로 가득 찬 염세의 공간이라면, 시골은 내면을 바라보고 재정립하는 사유의 공간이다. 혜원의 아주심기는 ‘지향하는바’에서 ‘그저 있는 것’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곧 서사의 미적 범주로 치면 혜원의 귀농은 우아미를 완성하는 요체인 셈이다.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온 시골에는 보고 싶은 엄마도 되돌아와 있었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아미로 영화를 완결하기 때문이다. 우아미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경험하기 어려운 색다른 판타지를 선사한다. tvN의 장수 프로그램 <삼시세끼>도 마찬가지로 우아미를 선사한다. 그저 현실 그 자체를 담아내지만, 그것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현실은 힐링으로 변모한다.

▲ tvN <삼시세끼>는 소소한 농촌 생활을 담아 힐링 메시지를 전한다. © tvN

현실에 우아미는 존재할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시골을 인간이 돌아갈 고향으로 묘사했지만, 대부분 사람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 이마저 특별한 서사가 돼버린 것이 현실이다. 관객은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여전히 결핍은 남아있다. 우아미의 서사구조를 사용하는 영화는 ‘있는 것’을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영화가 담아낸 시골 생활은 ‘있는 것’을 가장하지만, 결국 그것도 꾸며낸 환상에 불과하다.

이 영화를 보고 시골을 찾아도 영화 같은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등이 없고 조화만 존재하는 시골 생활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아미를 구현하려면 이 영화처럼 우아미를 가장하는 수밖에 없다. 우아한 삶은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 같은 걸까?


편집: 박서정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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