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박유리 ‘은희’

형제복지원. 박정희 정권 당시 내무부 훈령을 근거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서 운영된 ‘복지시설’이다. 실상은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감금해 구타∙학대∙성폭행∙강제노역을 자행한 ‘강제수용소’다. 국가가 지원했고, 언론은 찬양했으며, 시민들은 무관심했다. 단죄되지 않은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겨레>는 2014년 9~10월 토요판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3부작으로 다뤘다. 원고지 350매짜리 긴 글을 철저히 사실만으로 채웠다. 피해 생존자들이 몸으로 보여주며 토해내는 사연들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다.

파격적인 기사 형식으로 저널리즘을 구현한 기자는 마음 한 편이 무거웠다. 독자에게 정보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울림을 주는 것도 기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다.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성였던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사실의 조합이 진실이 될 수 있지만 사실이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소설적 진실’을 써 내려가는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난 5월 28일 박유리 작가의 첫 소설 <은희>가 나왔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빚어낸 ‘소설적 진실’

▲ 6월 12일 서울 토정로 5길 앤트러사이트 합정점에서 만난 박유리 작가는 “단서가 될 만한 사실 조각들은 있지만 소설 속 인물 중에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 홍석희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라 소설을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는 게 어려울 거예요.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게 저는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일이라 생각해요. 가해자 처벌이나 재산을 찾아오는 일도 역사를 단죄하는 방법이겠죠. 하지만 저는 거기에 방점을 두고 소설을 쓰진 않았어요. 우리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지 않을까요?”

참상을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은희>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3천여명이 갇힌 형제복지원에서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접하면 그저 ‘충격적’이고 ‘뜨악한’ 일로 받아들이고 이내 잊히기 마련이다. 소설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수용소라는 공간 안에서 극중 인물들의 선택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넌지시 묻는다. ‘당신은 수용소 안에서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박유리 작가는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본인과 독자 모두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길 바랐다. 그는 2017년 여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잠시 머물렀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아우슈비츠와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유사한 지점을 봤기 때문이다. 박 작가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민족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름 없이 버려지고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소설을 썼다.

▲ 형제복지원을 배경으로 18살 소녀 은희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인물 간 갈등을 다룬 소설책 <은희>의 표지. ⓒ 한겨레출판

빈곤한 자를 처벌하던 대감금의 시대

‘기억하지 않는다고 죄가 사라진 것은 아냐. 기억나지 않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이란 게 없군. 기억도, 과거도, 죄의식도 아무것도 없이.’ (109쪽)

소설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1987년, 과거사법이 끝내 통과되지 않으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좌절된 2015년 시점을 교차하며 28년의 세월을 복기한다.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인간답게 살려고 고뇌한 은희의 기억, 은희와 같이 수용소에 갇히면서 생긴 일련의 일들을 속죄하고 싶은 미연의 기억, 소대장 무열과 원장 방인곤의 기억, 이 사건을 알리고 싶은 병호의 기억, 그리고 은수의 기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혼동될 수 있다. 온전하지 않은 기억의 잔상은 여기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박 작가는 “타인과 관계 맺을 때도 그렇고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하는 데 방해한다”며 “기억은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이지만 결국 되돌아오고야 마는 현재의 시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지난 5월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형제복지원과 함께 서산개척단, 선감학원 등에서 벌어진 감금 사건을 파헤칠 길이 열렸다. 박 작가는 “당시 형제복지원 한 개의 괴물을 낳은 게 아니라 전국 36개 부랑인시설에서 가난한 자, 빈곤한 자를 처벌한 대감금의 시대였다”며 “그 시대가 법과 제도로 용인해줬다는 사실을 성찰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친구가 되어 달라’

▲ 박유리 작가는 “저에게 형제복지원이라는 타이틀은 너무나 유명한 악덕 복지시설, 인권 유린 사건이 아니라 옷과 이름을, 자신의 존재 전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나 자신을 찾아가고 회복하는 존엄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 홍석희

박 작가는 2017년 11월 7일부터 2년6개월 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인 형제복지원 생존자 최승우 씨와 한종선 씨에게 직접 <은희>를 전달했다. 그는 며칠 전 한 씨와 통화한 일화를 들려줬다. 그가 자신의 증언이 담긴 책 <살아남은 아이> 북콘서트에서 청중들에게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한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오늘날 빈부격차나 차별, 혐오에 관해 얘기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차별과 차이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하면서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수많은 이웃들의 애환을 드러낸다. 박 작가는 “이제 과거사법이 통과된 이상 이 사건은 계속 거론될 것”이라며 “소설 속 은희의 목소리를 들어보면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해보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되어야만 해. 여기서 사람으로 살 수 있어? 그 말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빨간 약도, 구타도, 감금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곳의 소유가 아닌 나 자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208쪽)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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