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저출산’

▲ 이복림 PD

며칠 전 발표된 올해 1분기 합계출산율은 0.9명으로 단연 세계 최저다. 인구를 유지하려면 2.1명은 돼야 하는데 처음으로 인구가 자연감소하는 상황이 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들던 생각이 떠오른다. 72년생인 내가 느꼈던 육아와 일 사이 갈등을 10년이나 어린 세대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데 실망했다. 한국의 출산·육아정책이나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정책은 20년이 지나도 거의 변화가 없다. 있다고 해도 피부로 느끼긴 어렵다.

97년 외환위기 때 중소기업에 입사해 몇 년 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산후휴가를 받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눈치를 봤던 것과 육아와 일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던 것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며 알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어느 미혼여성이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중소기업이나 사기업에서는 산후휴가나 육아휴직을 마음 편히 쓸 수 없어서 결혼이나 임신 등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 의아했다.

왜냐하면 요즘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은 떳떳하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받고, 육아휴직기간이 경력에 포함되기도 하니까 몇 년간 휴식을 취하려고 늦둥이를 낳는 모습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주변에서 보면서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아직도 예외적인 현상이었던 셈이다.

많은 곳에서 20년 전과 동일하게 여성에게 임신, 출산, 육아 부분이 불합리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임신 여성에게 눈치 주는 태도나 출산휴가 다녀오면 책상이 없어지겠지 하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일터의 분위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출산 후 우울증과 빙의증상이 나타나는 모습에서 실제로 나도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퇴사를 결정하면서 산후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겪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자기애가 강한 여성들은 임신, 출산, 육아라는 짐을 혼자 짊어지고 가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경우가 아주 많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이미지. © NAVER 영화

영화에서는 남편이 승진에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지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기업에 다닌다. 빙의증상을 앓던 아내는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다시 일터로 나가게 되면서 빙의증상이 사라지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에서 남편이 육아휴직을 낼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될까?

현실에서는 아기 엄마조차 육아휴직을 받고 마음 편히 복직할 수 있는 기업체가 거의 없다. 그러니 여성들은 결혼을 해도 임신을 꺼린다. 임신, 출산, 육아는 곧 여자의 일생을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하니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생기게 된다.

태어나서부터 경쟁시대에 살아 어려운 대학교육까지 받고 의도치 않게 육아에 전념하게 되는 전업주부의 삶이 여러 사회 문제를 낳는다. 결혼기피, 저출산, 정신질환, 경력단절 등 여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여러 정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공무원과 대기업 직원에 혜택이 집중되는 현실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는 차별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박탈감이야말로 출산기피의 요인이다. 정부의 저출산 정책은 가짓수만 늘릴 게 아니라 혜택을 고루 누리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지연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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