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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하는 날은 노는 날이에요”

기사승인 2020.05.23  21: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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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광장] 여성정책연구원 ‘초중등 성평등 교육의 현실과 활성화 방안’

집무실에서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 10대 제자 2명을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전 유도국가 대표 선수 왕기춘 씨, 텔레그램 성착취방을 운영한 조주빈과 문형욱 등…. 지난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성추행이나 성범죄에 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법적 사회적 제재 조처들이 취해지고 있는데도 성범죄는 계속되고 있다.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고발과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사회적 제재가 강화되는데도 성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인지 역량과 감수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면 초∙중∙고교에서 성평등 교육이 철저히 이뤄져야 하는데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 공간인 ‘n번방’을 최초 운영한 ‘갓갓’은 대학생 문형욱(24)이다. 경찰은 그의 범행 동기를 ‘성적 취향’으로 파악하고 있다. 잘못된 성관념이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KBS

성범죄 왜 줄어들지 않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최윤정 평등문화교육연구센터장은 최근 발표한 ‘초중등 성평등 교육의 요구 현실과 활성화 방안’ 보고서를 통해 성인지적인 역량과 성에 대한 민감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시하는 초중고 성평등 교육 및 성폭력 예방 교육이 진부한 교육 방법과 실효성 없는 교육 내용으로 겉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성평등이나 성폭력예방) 교육을 시험 끝나고 방학 며칠 전에 하루 전체를 잡아서 몇 교시부터 몇 교시까지 실시하는데,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떠들어도 뭐라고 안 할 정도로 관여를 하지 않아요.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면 ‘이날은 노는 날이구나’ 생각합니다.”(중학교 남학생)

“반에서 TV로 켜 주는 걸 보니까 다 자요.” (고등학교 남학생)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로 사이버 성폭력도 있고 그런 식으로 주제를 나열해요. 양성평등은 아예 기억나는 게 없고, 성폭력도 다 아는 기초적인 것들 밖에 없어요.” (중학교 여학생)

최 센터장이 작년 7월 9~25일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 등 총 4,41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뒤 초등학교 6학년 10명, 중학교 1~2학년 13명, 고등학교 2학년 11명을 초점집단인터뷰(FGI)한 결과 이런 반응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학기말에 하루에 몰아 집합수업

   
▲ 초∙중∙고 학생들이 받은 성평등 교육 방식을 물은 결과 ‘전교생 대상으로 실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우리 학년에서만 실시’, ‘우리 학급에서만 실시’가 뒤를 이었다. ⓒ 윤상은

최 센터장은 학교 성평등 교육이 학년별로 성별로 습득능력 등을 고려해서 실시해야 효과가 있는데도 조사대상 학생 60.4%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성 관련 수업이 이뤄진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조사대상자 중 ‘우리 학년에서만 실시한다’는 답변이 28.4%, ‘우리 학급(반)에서 실시한다’는 답변이 27.7%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전체 학년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최 센터장은 “전체 학년을 대상으로 집합교육을 할 경우 학생들의 수업태도, 집중도 등을 파악할 수 없고 교수자 중심의 일방적인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학교들이 법정과목으로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성 관련 교육 실적을 제출하기 위해 학기말이나 학년말에 하루에 몰아 몇 시간씩 연속으로 집합교육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질적인 성평등이나 성폭력 예방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예방 등에 필요한 내용은 부실

   
▲ 초∙중∙고 학생들이 원하는 성평등 교육 개선 사항을 물은 결과 ‘학생들이 공감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이면 좋겠다’는 응답이 가장 높았다. ⓒ 윤상은

성교육과 성폭력 예방 교육을 포함한 성평등 교육의 내용도 유사하고 기초 수준인 것이 많아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남녀평등 교육보다는 성교육이라고 해서 묶어서 진행하는데 성교육은 2주일에 한 번씩 목요일 자율 시간에 외부강사를 초청해서 방송을 틀어줘요. 정말 쓸 데 없는 내용이에요. 말만 성교육이지, 내용이랑 관련이 없는데 시간 때우려고 틀어 놓는 것 같아요. (성평등 교육은) 어쩌다 한 번 하기는 했는데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요.” (중학교 여학생)

“(수업 내용이) 중3 정도 되면 남녀 불문하고 다 아는 내용이에요. 콘돔 씌우는 법을 더 자세히 알려주거나… TV광고할 때 맨날 피임약 광고만 나오지 콘돔 광고를 본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남학생)

학생들은 실제 성폭력 예방이나 성평등 의식을 길러 주는 데 필요한 내용을 원하지만 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성 관련 교육은 이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2018년 2월 인천 미추홀구에서 한 여중생이 친구였던 남학생 2명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또 다른 남학생들에 의해 피해 사실이 유포되는 2차 가해를 받아 투신자살했다. 청소년 성범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학교에서의 성인지 역량 강화 등 관련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KBS

진로지도 때 남학생한테만 과학∙기술 권유

성범죄 예방이나 성평등 실현을 위해 선행돼야 할 학교내 성차별도 제대로 개선되지 않고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 연구원은 조사대상 초∙중∙고 학생 중 14.1%가 학교 생활 중 성희롱, 성역할 구분 등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을 본인이 직접 당하거나 다른 사람이 당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학교별로는 고등학생이 18.1%, 중학생이 15.2%, 초등학생이 9.4%로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성차별 경험이 많았다. 성별로는 여학생이 19.3%, 남학생이 9.0%로 여학생이 학교생활 중 더 자주 성차별적 상황에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 센터장이 초점집단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성차별 경험을 조사한 결과 초등학생들은 성별에 따른 배려라고 생각하고 한 교사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느낄 때가 있었다. 한 초등학교 남학생은 “버스 탈 때 여자애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말했고, 초등학교 여학생은 공놀이를 하는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여자애들은 공을 무서워하니까 다른 걸 시켰고, 남자애들만 공을 가지고 놀았다”고 답변했다. 남녀 간 신체 특성의 차이가 크지 않고, 남녀간 능력의 차이 등을 많이 겪어 보지 못한 성장 단계에서는 성인들의 남녀 성 차이에 관한 고정관념으로 학생들을 대하면 학생들이 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응답자의 78.9%가 복장지도, 생활교육 등 학교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 센터장은 “남학생은 두발 규정과 관련해 남학생의 처벌이 여학생보다 심하다고 느꼈다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여학생은 ‘불편하게 나오는 치마 디자인, 작게 나오는 교복 사이즈, 치마 교복을 꼭 사야 바지 교복을 구매할 수 있는 것 등 불편한 교복으로 인해 제한되는 활동이 많은 것’을 차별로 느끼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또 “교사로부터 진로 상담을 받을 때 남학생들에게 과학∙기술 관련 분야를 더 많이 권유한다”는 것을 차별로 생각했고, 이에 대해 남학생들은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 소설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 여성들이 학교, 직장에서 겪는 성차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사진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포스터 ⓒ 영화<82년생 김지영> 포스터

학생 열에 여섯은 성차별 대응 못해

   
▲ 초∙중∙고 학생들은 성차별적 발언 또는 행동을 경험하거나 목격했을 때 특별한 대응 없이 그냥 넘긴 경우가 가장 많았다. ⓒ 윤상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성차별을 경험하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응답자도 64.7%에 이르렀다. 대응을 했다는 학생들은 상대방에게 직접 사과를 요구한 경우는 20.8%였고,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나 부모님, 친구 등에게 도움을 요청한 경우가 10.3%였다. 대외적으로 공론화할 때는 학생자치기구와 SNS, 대자보를 통해 알린 경우가 각각 4.5%, 교육청에 신고 또는 제보한 경우가 3.8%, 경찰에 신고 또는 고발한 경우가 2.0%에 그쳤다.

최 센터장은 “학생들이 부당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고 싶지 않은 청소년기 또래의 특성과 문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등 복합적”이라며 “근본 원인은 성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고 말했다.

“많은 학생들이 성차별 상황을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게 차별과 혐오라는 걸 알지만 신고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사회에서 성 차별과 혐오가 일상화해 학생들도 성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는 거죠. 또 다른 이유로 학생들은 신고해도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아요. 단순히 성평등 교육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혐오를 개선하고 자정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없어요.”

여성 서사 공감할 수 있는 성평등 교육

최 센터장은 성평등 교육을 제대로 실시해 성인지 역량과 성인지 감수성을 향상시키려면 교육현장의 교사와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표준 교안을 만들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특히 “성 관련 교육 콘텐츠가 여성의 서사에 공감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성평등적 관점을 각 교과에 다 반영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을 개발해 학생들이 성평등 문화를 받아들이고 습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 센터장이 성평등 교육 강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초점집단인터뷰에 응한 한 강사는 “교안이 진짜 문제”라며 “어떤 강사는 오래 전에 사용하던 걸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업이 너무 지루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응답했다.

“지금 성평등 교육이 역할 위주, 집안일, 일∙가정 양립에만 치우쳐 있어요. 여자가 애 낳고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교육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것 같은 교육이에요. 교육부에서 내려오는 자료 같은 게 여성이 사회 진출을 많이 하고 있다, 사회 진출을 하면서 육아휴가를 쓰고 있다, 와~ 그게 이뤄지면 양성평등이 이뤄진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겁니다.” (성 관련 교육 교사)

여성 서사에 공감하는 등 다양한 성평등 관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단순히 여성의 사회 진출, 일 가정 양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실질적인 성평등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보수·진보의 기울어진 언론 지형과 극성스런 가짜뉴스 등으로 건전한 여론형성이 힘든 사회입니다. 제대로 이슈화가 안 되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갈등이 잠복하는, 이른바 ‘Non-issue, Non-decision Society’가 바로 한국입니다. 주요 정책이나 법을 결정할 때 공론화 또는 숙의 과정이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학계 또는 소수자의 건강한 목소리조차 기성 언론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네이버> <다음> 포털과도 뉴스검색제휴를 한 <단비뉴스>가 여러분의 목소리를 확성하는 [여론광장]을 개설합니다. 자료를 미리 보내주시면 취재에 도움이 됩니다. (편집자)

편집 : 오동욱 PD

윤상은 기자 nadf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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