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⑬ 서울 ‘경춘선 숲길’

▲ 서울 노원구 공릉동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근처 경춘선 숲길. 화랑대역 4번 출구에서 화랑대 폐역 쪽으로 200m쯤 가면 길게 휘어진 산책로가 나타난다. ⓒ 김계범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략수탈사와 궤도를 같이 한다.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경인선을 비롯,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등 한반도를 X자로 연결하는 간선 축을 모두 일본이 건설했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관(釜關)연락선으로 현해탄을 건너와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연결하는 종단철도를 건설해 한반도와 대륙 침탈로를 구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처음 서울 노량진과 인천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주고, 서울 용산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은 프랑스의 ‘피브릴르’ 회사에 주었다. 또 대한제국은 서울-목포, 서울-원산-경흥, 원산-평양 등을 잇는 철도 건설을 추진했으나, 미국인 모스와 프랑스 회사는 물론 대한제국 정부도 막대한 철도 건설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중도 포기하면서 모든 철도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간다. 

일제 때 민족자본으로 만든 사설 철도

▲ 서울 노원구 공릉동 화랑대 폐역 구내 플랫폼에 전시돼 있는 미카5-56호 기관차. 이 기관차는 1952년 도입해 1967년까지 사용된 기종으로, 지금은 기관실 내부를 공개해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두었다. ⓒ 김계범

이후 우리나라의 주요 철도 간선축은 모두 일제시대에 건설됐다. 1905년 경부선(서울-부산),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 1914년 호남선(대전-목포)과 경원선(용산-원산), 1929년 충북선(조치원-충주), 1931년 장항선(천안-장항), 1936년 전라선(익산-여수), 1939년 경춘선(성동-춘천), 1942년 중앙선(청량리-경주) 등이 차례로 완공됐다. 

철도 노선 중 유일하게 우리 민족자본으로 만든 노선이 있으니 바로 1939년 7월 25일 개통한 경춘선이다. 조선총독부가 강원도청을 당시 전국의 도청 소재지 중 유일하게 철도가 없었던 춘천에서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춘천 유지들이 도청 이전을 막기 위해 ‘경춘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춘선을 건설했다. 철원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갈라지는 중부지역 교통거점이어서 총독부가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철원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충남도청 소재지였던 공주시가 철도 유치를 하지 못해 1932년 대전에게 도청소재지를 뺏기고 인구 10만 전후 소도시로 전락해버린 것을 보면 춘천시민들의 반발이나 절박감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경춘선은 지금 서울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 근처에 있던 옛 성동역과 춘천역간 87.2km를 이어주는 민자 사설 철도였다. 경춘선은 서울과 강원도청 소재지 춘천을 연결해주는 간선교통로 역할을 하면서 두 세 차례 변신을 한다. 해방 이후 1946년 사설 철도 경춘선은 국유화했고, 이후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등의 열차가 많은 사람들을 싣고 이 길을 달렸다. 1971년에는 성동-성북 구간이 폐선되면서 시발역이 청량리역으로 바뀌었다. 경춘선은 북한강변을 따라 철길이 나 있어 주변 경관이 좋고 청평역 가평역 강촌역 근처에 관광 휴양지가 많아 젊은이들이 애용하던 노선이다. 

‘춘천행 기차는 가네, 5월의 내 사랑 숨쉬는 곳’

▲ 옛 경춘선 화랑대역 근처에 서있는 무궁화호 열차 ⓒ 김계범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 가네
그리운 사람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잔 마시고 싶어
저녁 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가수 김현철이 어느 겨울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가면서 만든 노래 ‘춘천 가는 기차’의 한 구절이다. 그에게도 경춘선은 대입 재수생 시절 5월에 여자 친구와 여행을 가던 추억 어린 곳이었다. 

경춘선은 세월을 따라 변화를 거듭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경춘선 열차를 추억한다. 경춘선 열차는 청춘이 살아 숨 쉬는 열차다. 경춘선은 남녀노소 누구나 많이 이용하지만 주말에는 특히 젊은 청춘들이 많이 탄다. 이제는 중년이 된 이들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경춘선 청춘열차에 올라 젊은 날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경춘선은 대학시절 MT를 가던 길이거나 데이트를 가던 길이었고, 입영열차를 타고 춘천의 102보충대로 가던 길이기도 했다.

어느 소설가는 ‘청춘’(靑春)의 ‘청’(靑)은 오늘의 청년들에게는 시퍼렇게 멍이 든 푸름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오늘날 청춘들의 삶이 이전보다 고단하고 아픔으로 점철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춘은 알 수 없는 불안이나 미숙함과 함께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꿈과 부딪혀 볼 수 있는 도전이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를 설레게 한다. 이런 청춘들이 경춘선 ITX 청춘열차나 전철을 타고, 대성리, 가평, 청평으로 연인과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과 MT를 떠난다.

▲ 서울 노원구 공릉동 화랑대 폐역 구내의 플랫폼 ⓒ 김계범

5월이 오면 그 이름만으로도 봄 향기를 느끼게 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경춘선은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 전철(상봉역~춘천역)이 개통되면서 역사속으로 퇴장했다. 개통 이후 72년 동안 단선으로 운행하던 노선을 복선전철로 바꾸고 성북-퇴계원 구간을 폐지해 시발역을 상봉역으로 바꾸면서 도심 구간 경춘선은 폐선이 됐다.
 
젊은 청춘들을 가득 싣고 ‘청춘’(청량리-춘천)을 오가던 열차는 사라지고 쓰레기장과 불법 주자창으로 방치돼 있던 경춘선은 폐선 7년만에 ‘경춘선 숲길’로 거듭났다. 서울시가 도심재생사업을 통해 녹색 선형공원으로 탈바꿈시키겠다며 2013년 광운대역~서울시계 구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17년 월계동에서 삼육대 앞까지 6Km 전 구간을 완공해 시민들의 산책과 휴식 공간으로 제공한 것이다. 

청춘열차 대신 ‘경춘선 숲길’을 거닐며

▲ 서울 노원구 공릉동 화랑대역 2번 출구에서 태릉입구역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장미터널. 오월이 왔음을 알리듯 활짝 핀 장미들 사이로 사람들이 걷고 있다. ⓒ 김계범

‘경춘선 숲길’은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좋다. 발길 닿는 대로 코스 중간에서 시작해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것이 이 길의 매력이다. 처음 가는 길이라면 서울지하철 7호선 하계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나오는 ‘경춘선 숲길’ 방문자센터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방문자센터는 과거 경춘선 철길 위를 달리던 무궁화호 객차 2량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무궁화호 운행 당시처럼 수동으로 객차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내 직원의 설명과 함께 ‘경춘선 숲길’에 관한 팜플렛을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심신이 지쳐 가고 있는 상태에서 경춘선 청춘여행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 대신 청춘의 추억을 만들고 되새기면서 경춘선 숲길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 경춘 철교에서 바라본 중랑천의 해질 무렵. ⓒ 김계범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월계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경춘철교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중랑천과 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의 전망이 아주 멋있다. 경춘철교의 양 끝에는 중랑천과 연결된 계단과 승강기가 있어 중랑천 산책로로 내려가 천변을 걸어도 좋다.

월계동 녹천중학교 부근에서 ‘경춘선 숲길’ 방문자센터로 걷는 코스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 있다. 자연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멍든 청춘의 마음도 조금은 치유될 것 같은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숲길 한쪽으로는 주민들이 일궈 놓은 텃밭들이 있다. 주민들이 이 ‘생산정원’에서 농사를 짓고 정자에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노원음악방송>이란 지역방송이 주민이나 방문객의 신청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고 있다. 직접 노래를 신청해보았다. 철길 스피커를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날로그 감성의 라디오방송이지만, 사연과 음악은 첨단 디지털 휴대전화를 이용해 신청한다. 직접 신청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숲을 걷는 느낌이 든다.    

멀리 석양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주위가 어두워지고 양쪽 난간에 형형색색으로 조명이 변하는 다리가 나타난다. 밤에는 밤대로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7호선 공릉역 근처에 이르면 기찻길 건널목의 흔적이 남아 있다. 멈춤을 알리는 검정색과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표지판과 철도 신호등은 빛 바랜 그림 속 풍경 같다. 자연과 사람의 일상이 하나가 된 이 숲길을 걷다 보면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가 떠오른다. 

▲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경춘선 숲길은 빛의 향연을 제공한다. 화려한 불빛들이 다양하게 변하면서 눈을 즐겁게 해준다. ⓒ 김계범

뉴욕 ‘하이라인 파크’가 철로공원 원조

 
미국 뉴욕시 맨해튼 11번가 갱스부르부터 미드타운 34번가 제비츠 컨벤션센터까지 22블록에 걸쳐 있는 하이라인 파크. 지난 2009년 6월 화물선 철도였던 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문을 연 산책로에 사람들이 걷고 있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강의 풍경과 강 건너 보이는 뉴저지 주의 건물들 ⓒ 김계범

뉴욕 ‘하이라인 파크’는 화물열차가 달리던 철도 노선이 폐쇄된 뒤 철로의 도심 구간을 공원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2009년에 2km 남짓 되는 고가 다리 위에 놓여 있던 철길에 꽃과 나무를 심고 벤치와 휴식공간을 만들어 자연친화적인 도시재생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허드슨강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명소가 됐다. 하이라인 파크가 화려한 도심의 속살을 보여준다면 ‘경춘선 숲길’은 일상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치유 공간이다. 

▲ 밤에 불빛을 받아 환하게 보이는 경춘선 숲길의 벽화. ⓒ 김계범

경춘선 숲길은 시민들의 문화공간 구실도 한다. 숲길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벽화와 전시된 예술작품도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걷다 힘들면 잠시 들어가 쉬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밥집과 카페가 숲길 사이사이에 있다. 작은 책방들도 눈에 띈다. 숲길을 따라 카페, 식당, 책방 등 다양한 종류의 가게가 생기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이곳에는 ‘공트럴파크’(공릉동+센트럴파크)란 별명이 붙었다. 

▲ 숲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옛 경춘선 화랑대역. ⓒ 김계범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근처에 다다른다. 조금 더 걸어가면 경춘선 역중 하나였던 화랑대역이 있는데 등록문화재 300호로 지정돼 간이역의 예전 모습을 잘 보여준다. 화랑대 역 주변으로는 미카5-56호 증기기관차, 무궁화호 열차 등 예전에 운행되던 열차와 철도 관련 시설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에겐 추억의 흔적도 어딘가 남아있을 것 같다.  

▲ 서울 노원구 하계동 ‘경춘선 숲길’ 방문자센터 근처에 있는 철길 산책로. 서울 청량리역에서 춘천역으로 가는 열차가 달리던 철길이 길게 뻗어 있다. ⓒ 김계범

‘사랑은 청춘의 상징이요, 그 별입니다. 우리들의 청춘은 사랑에 대하여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싼 술에 팔려가는 청춘보다는 사랑을 위해 발산되는 청춘이 정상적이요, 옳은 일입니다. 더욱 더 많은 우리들의 청춘의 발산법이 앞으로의 ‘한국의 청춘’을 빛낼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중 ‘청춘 발산을 억제하지 말라’는 글의 한 대목이 불현듯 떠오르는 봄 밤의 숲길이다.

▲ 서울 노원구 공릉동 화랑대역 근처에 있는 장미터널에 피어있는 장미꽃 ⓒ 김계범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신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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