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오월’

▲ 이예슬 기자

다시 오월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까지 모두 보내고 나니 ‘그날’이 왔다. 흔히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기억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며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이 흐려질 거라 위로한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해의 광주는 여전히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광주시민은 아직 1980년 오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80년 5월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광주시민 533명’을 대상으로 한 시민 인식 조사 결과, 93.5%가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5월이 되면 5·18에 대한 생각이 난다’고 답했다. 62.9%는 현재까지 5·18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고, 절반 가까이는 공포와 불안을 떨치지 못해 정상생활까지 어려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고위험군에 속했다. 

트라우마의 ‘기념일 반응’. 5·18 민주화운동이나 미국의 9·11 테러, 세월호 참사와 같이 충격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를 입은 날짜나 계기를 맞으면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고, 마음과 몸이 고통을 호소한다. ‘기념일 반응’은 애도나 위로가 충분하지 못했을 때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 5·18 4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1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거리에서 오월시민행진이 펼쳐져 시민들이 5·18 희생자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은 자연계 구성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는 이런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광주 금남로에서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겠다는 자유연대 등 태극기부대, 그리고 희생자들을 ‘홍어 택배’라 희화화하는 일간베스트. 그들의 공감능력은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키운다. 트라우마는 소화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이고, 그날의 기억은 희생자와 유족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소화하려 노력할 때, 비로소 광주 트라우마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27일, 전두환이 광주를 다녀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으러 온 것이다. 재판 내내 팔짱을 끼고 있다가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 그는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다”며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치부되어 희생자들을 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하던 시절에 견주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가해자를 재판할 수 있는 지금은 그나마 희망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왜곡 처벌이 가능한 정치적 여건이 갖춰졌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이달 내로 조사를 개시할 예정이다. 최장 3년의 진상규명조사위 활동 기간에 해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발포명령자 규명이다. 헬기 사격 경위와 진실 은폐·조작 의혹, 계엄군의 성범죄 의혹의 진상 규명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잔인한 5월, 트라우마의 시절이 또 흘러가고 있다. 기억의 공유와 공감이 절실한 때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연대의식이 더 절실해진 지금, 다시 한번 모두가 연대해 40년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 긴 터널을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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