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주슬기 청년이그린협동조합 조합원

논두렁길 끝에 환한 얼굴이 피어있다. 두 팔을 힘껏 흔드는 게 꼭 바람에 너풀거리는 나무 같다. 동그란 안경과 눈매처럼 마음씨도 둥글둥글한 청년일까? “여까지 오느라 고생하셨니데이.”

▲ 경북 상주시에서 친환경농사를 짓는 청년이그린협동조합 조합원 주슬기 씨. ⓒ 최유진

농촌에 산다는 건, 어렵고 즐거운 도전

“도시에 살 때는 가스가 끊긴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여기서는 밥해 먹으려면 전화해서 LPG 가스통 배달을 시켜야 해요. 따뜻하게 자려면 기름값도 진짜 장난 아니더라고요.”

경북 상주시 이안면 아천1리, 지금은 폐교가 된 은척중학교 아산분교. 이곳에 서른 살 주슬기 씨가 4년째 살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흙이고 풀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농사’ 뿐인 게 실감 난다. 

▲ 주슬기 씨가 4년째 사는 관사. ⓒ 청년이그린협동조합

“다들 폐교에 산다고 하면 놀라죠. 처음엔 버티는 기간이 필요한데, 이것도 농촌에 온 재미죠. 억지로 온 사람에겐 힘들겠지만요. 아파트 같은 집도 없고, 기본적으로 이삼십 년 된 집인데 그것도 구하기 정말 힘들거든요. 처음부터 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청년이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을까? 주슬기 씨는 “사실 모아둔 돈을 까먹으며 지냈다”면서도 “참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농촌 사회적기업을 꿈꾸던 부산 청년은 2017년 상주 아천리마을로 귀농했다. 사회적기업 설명회에서 장동범 아천1리 이장을 만난 덕이다. 장 이장은 저출산 고령화를 겪는 마을에 청년이 많아지길 바랐다. 폐교 관사를 숙소로 제공하자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17년 9월, 마을 주민 2명과 청년 7명이 함께 ‘청년이그린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옛 교실은 조합 사무실로 탈바꿈했다.

▲ 칠판에는 농사를 공부한 흔적이 빼곡하다. ⓒ 최유진

주슬기 씨는 귀농 청년에게 ‘지역 멘토’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주민과 사이에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해줄 수 있어서다.

“어른들도 청년이라고 무조건 좋아하지는 않아요. 일단 외지인이잖아요. 소개라도 한 번 해주면 나아요. 저희는 이장님 덕분에 마을 어르신들과 자연스레 섞일 수 있었죠.” 

주슬기 씨는 친손주처럼 꾸밈없이 어른들에게 다가가고, 일부러 농민의 생활 패턴에 맞추는 노력도 했다.

“밤늦게까지 불 켜놓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면, 어른들 눈에는 게을러 보일 수 있어요. 아침 6시에 깨서 일하면, 한낮에는 오히려 들어가라고 말리시던걸요.”

▲ 청년이그린협동조합 조합원들. 가장 왼쪽이 주슬기 씨, 왼쪽 세 번째 인물이 장동범 이장이다. ⓒ 청년이그린협동조합

붕어가 돌아오는 ‘80년대 농촌’ 꿈꾸는 이유

청년이그린협동조합은 ‘프로젝트 1980’을 추진하고 있다. 1980년대 아천리마을을 복원하는 일이다. 저수지에 붕어와 새우가 살던 때로 돌아가면, 소농에게 좋은 환경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한다. 첫째,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 둘째, 즐겁고 행복한 농촌. 셋째, 청년이 있는 농촌이다. 2019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업환경보전프로그램 마을로 선정됐다. 주민들도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 주슬기씨가 분교 안 작은도서관에서 프로젝트 1980 마인드맵을 소개하고 있다. ⓒ 최유진

“협동조합의 핵심이 ‘너와 내가 어떻게 잘 살까’ 아닌가요? 농사도 자연과 내가 둘 다 좋은 게 뭘까, 고민하다 찾은 답이 친환경농사예요.”

주슬기 씨는 청년들과 유용미생물을 활용해 친환경농사를 짓는다. 겨우내 농사 공부 모임을 진행하고, 전국의 친환경 전문가를 초청해 1박 2일 세미나도 열었다. 그는 “은행을 끓이거나 왕겨를 태우고 음식물찌꺼기까지도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건 다 모은다”며 “부지런하기만 하면 천연 약제를 비교적 저렴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 친환경농사에 사용하는 왕겨 훈탄. ⓒ 청년이그린협동조합

뜻이 맞는 청년들과 친환경농사를 짓고, 마을 생태계도 살려내고 싶었던 장동범 이장은 주슬기 씨를 청년이그린협동조합 ‘청년 1호’로 영입했다. 

“슬기가 관사에 살면서 3년 동안 버텨준 것만도 대단하죠. 그런데 청년이 시골에 내려왔으면 남과 다른 농사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촌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생각도 있으니 감사하죠.”

▲ 주슬기씨(오른쪽 두 번째)가 같이 생활하는 청년 조합원들. ⓒ 최유진

주슬기 씨는 청년 조합원들과 올해 고추 1200평, 쌀 1000평, 콩 2000평, 시설오이 하우스 400평을 친환경으로 농사짓는다. 그는 “돌아보니 마을 주민들 기본 바탕이 다 농업”이라며 “육체적으로 힘든 게 사실이라 그냥 ‘로망’ 때문에 농촌에 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농사 대부분을 어르신들이 다 가르쳐줬다”며 “나머지는 유튜브 영상도 보고 유기농가 견학도 다니면서 채웠다”고 밝혔다. 올해는 고추밭 이랑을 관행보다 2배가량 넓게 만들었다. 

“밭일하고 있으면 어르신들이 다 나와서 구경하세요. 왜 이렇게 땅을 많이 쓰냐고 말씀하시죠. 적게 심지만 많이 달리게끔, 병도 잘 안 걸리도록 하려는 거예요. 올해 친환경농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 고추밭 이랑을 만들고 있는 주슬기 씨. ⓒ 최유진

칠전팔기 각오, ‘대산장학생’이기에

주슬기 씨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10년 후에도 농사짓고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대학 시절 대산농촌재단에서 ‘농업리더장학생’으로 활동한 경험이 농촌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장학생 연수를 다니며 확고한 철학을 가진 농민을 많이 만났어요. 거창 이수미팜베리의 이수미 대표님은 양계장이 망한 뒤에도, 어려운 베리 농사에 도전하셨죠. 그것도 유기농이요. 남다른 노력을 많이 봤기 때문에, 저도 농사를 쉽게 포기할 수 없어요.”

▲ 대산장학생 하계연수. ⓒ 대산농촌재단

그는 장학생 연수를 통해 만난 농민과 전문가를 떠올리며,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고 했다.

“지리산 산내면 농촌공동체에 방문했을 때도 깊이 감동했죠. 청년들이 잘 정착하도록 자기 재능과 시간과 물질까지 내어주는 분들 덕분에 공동체가 지속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 멘토 이장님도 그런 분이죠. 저도 언젠가 그런 역할 할 수 있겠죠?”

오래된 학교 복도가 삐걱삐걱 울린다. 밭으로 향하는 청년의 발걸음이 기운차다. 스스로 농촌에서 미래를 개척해가는 이 청년, 참 슬기롭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의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대산농촌문화> 2020 봄호에도 실렸습니다. (편집자)

편집 :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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