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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혈액이오’ 내가 수혈하러 가는 곳

기사승인 2020.04.24  21: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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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린 황상호 uq2616@gmail.com

- [어서오너라 벗고놀자] 황상호-우세린 부부 여행기 ⑯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의 작용으로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이 원주민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 보드카와 진. 패소로블스는 술의 천국이다. © 황상호

‘현명한 자는 술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람’

“나는 치통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밤 스카치위스키를 마신다. 이제까지 치통을 앓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럴 의향도 없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그는 심지어 "현명한 사람은 두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자살하는 사람이오, 또 하나는 술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람"이라 했다. 가히 과격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매일 밤 그가 치아를 위해 위스키를 마시는 마음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술을 거나하게 걸치고 구수해진 입안을 어찌 싸구려 치약으로 마무리하겠는가? 나도 가끔 아내에게 “이 좀 닦으라”는 타박을 듣곤 한다. 하지만 거 봐라. 나 역시 아직 치아가 상아빛 건치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으로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다 중년에 금주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하루 맥주 30캔. 그에게 맥주는 술이 아닌 ‘혈액’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출신이자 ‘하층민의 국민 시인’이라 불리던 찰스 부코스키 역시 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에서 세상 모든 술주정뱅이를 변호했다.

‘일찌감치 죽음을 맛보는 것도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교회와 술집과 박물관을 멀리하고 거미처럼 
인내한다 
시간은 
모두에게 십자가이자 
유배 
실패 
기만 
말짱 도루묵이니까. 
맥주와 함께한다. 
맥주는 한결같은 혈액이다. 
한결같은 연인이다.’

내가 정기 수혈하러 가는 곳,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샌루이스오비스포 카운티 패소로블스다. 마른 목을 축이기 딱 맞는 곳이다. 요즘 말로 ‘찐’이다. 샌루이스오비스포 카운티를 줄여 ‘슬로 카운티’(Slo County)라 부른다. ‘더블유’(w)자 한 자가 더 붙으면, 정말 슬로우(Slow)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패소로블스에는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에서 가장 긴 282Km짜리 샐리나스강(Salinas River)이 흐른다. 강줄기는 아몬드밭과 사과밭, 포도밭을 고루 적신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와인 생산량 90%를 차지하는데 이곳은 북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와 소노마밸리에 이어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와인 생산지다. 독립 브랜드가 있는 와이너리만 250여 개다.

   
▲ 패소로블스 한 와이너리. 나무 아래서 결혼식이 열리기도 하는데 좌우로 포도 넝쿨이 자란다. © 황상호

원주민이 술에 쉽게 중독된 사연 

이곳에서 포도밭을 처음 일군 건 스페인 군대와 기독교 수도사다. 토착민 살리나스 부족을 비롯해 아메리칸 원주민은 술을 여흥으로 마시지 않았다. 영적인 세계를 만나기 위한 연결 고리로 씨앗과 뿌리, 과일 등을 발효시킨 음료를 마셨을 뿐이었다. 후일 원주민이 백인이 들여온 유럽의 독한 증류주인 오드비, 럼에 쉽게 중독된 데도 이런 배경이 있다.

1797년 스페인 탐험가 프랜시스코 코르테즈(Francisco Cortez)는 멕시코 정착민을 독려해 이 지역에 첫 와이너리인 '더 파드레스 오브 더 미션 샌 미구엘'(The Padres Of The Mission San Miguel)을 패소로블스 북쪽에 만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는 ‘미션’이라는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기독교인에게 와인은 성찬식 성체였고 포도가 자라는 곳은 지상이 아닌 천상이었다.

포도밭이 상업적으로 일궈진 건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막을 내리고부터다. 황금 열병이 가라앉자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다니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고향에서 키우던 포도를 들여와 가풍으로 내려오던 와인 제조법으로 술을 빚었다. 1882년에는 인디애나 출신 앤드류 욕(Andrew York)이 사과밭을 사들여 중부 캘리포니아 최초의 상업적 와이너리인 ‘욕 마운틴 와이너리’(York Mountain Winery)를 만들었다. 그 뒤 2001년까지 운영하다 2003년 지진으로 시설물이 거의 부서졌다. 현재 그 자리에 에포크 와이너리(Epock Winery)가 들어섰다.

이곳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의 주류가 아몬드 재배였다. 이 때문에 ‘아몬드 시티’(Amond City)라 불렸다. 와인 산업이 본격화한 건 1960~70년대 들어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양조학과가 있는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 출신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다. 그들은 기후와 토양 미생물, 온도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했다. 대표주자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개리 이블리가 있다. 그는 해당 대학에서 양조학을 공부하고 패소로블스에서 에벌리 와이너리(Eberle Winery)를 세웠다. 국제 와인 대회에 참가해 잇따라 수상하고 있다.

   
▲ 패소로블스에 있는 스컬프테라 와이너리. 금속 공예품들이 선반 곳곳에 전시돼 있다. © 황상호

스티브 잡스가 극찬한 와인

포도는 토질과 날씨가 매우 중요하다. 이곳은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멀리 태평양에서 해풍이 불어온다. 새벽에는 차가운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는다. 땅은 석회질 토양이라 배수가 쉽다. 비도 포도가 다 자란 11월 이후 내려 포도 당도를 높게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분홍빛을 띠는 백포도주 진판델(Zinfandel)이 가장 인기가 많다. 이 밖에 카베르넷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샤르도네(Shardonnay) 등 와인 40여 종이 생산된다. 

와이너리 토빈 제임스 셀러스(Tobin James Cellars)에서 만난 소믈리에 피제리는 패소로블스 와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 와인은 (북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와인보다는 바디감이 가벼워. 하지만 포도 본연의 맛과 향이 은근히 풍겨 나오지. 그래서 여름에 마시기 좋아. 물론 많이 마시다 보면 어느새 취해버리고 말지.”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이곳 포도를 극찬했다. 책 <스티브 잡스 무한혁신의 비밀>에서 잡스는 척박한 땅에서 지하수를 힘껏 빨아당겨 높은 당도를 만들어 내는 이 지역 포도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경탄했다고 한다. 와인 코르크 마개가 ‘뽕’하고 열리듯 잡스의 기찬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왔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주머니 얇아도 걱정 No, 취해도 걱정 No

와인 투어는 필수다. 와이너리마다 10달러 정도 내면 대표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건물과 인테리어도 술맛을 더한다. 금속으로 제작한, 물고기와 표범이 있는 스컬프테라 와이너리(Sculpterra Winery), 대형 원형극장이 자랑인 비나 로블스(Vina Robles), 동굴 브이아이피 식사 코스와 무료 와인 동굴 투어를 할 수 있는 40년 전통 에벌리 와이너리, 푸른 인공 수로에 둘러싸인 성체, 앤 네일 와이너리(Tooth & Nail Winery) 등이 있다. 와인 한 잔만 시키고 정원에서 시간을 한참 보내도 간섭하는 이가 없다. 나도 모르게 취했다고? 가게마다 대리 운전 기사인 프라이빗 와인 드라이버 명함이 비치돼 있다. 개인 차량 와인 투어는 시간당 30달러다.

매년 5월 패소로블스 시립공원에서는 사흘간 패소로블스 와인 축제(Paso Robles Wine Festival)가 열린다. 하루 입장권이 70달러다. 축제장 입구에서 와인 잔을 나눠주는데 이 잔을 들고 지역 양조주 40여 개 부스를 돌아다니며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도 입장해 분홍빛 로제 와인만 주야장천 마셨다. 한쪽에서는 밴드 공연이 펼쳐지고 아래서 춤판이 벌어졌다. 그렇다 해서 음주 난동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와인에는 진리가 있다고 말했나 보다. 책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의 일부다.

‘마른 돌담과 목재로 만든 문으로 둘러싸인 포도밭, 새벽부터 황혼까지 한 줄기 빛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몽라셰 마을의 초원도 토양에 속한다. 이 모든 것들과 그 이상의 것들이 와인에 녹아들어 있기에, 알렉상드르 뒤마(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프랑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숭배하는 마음으로 와인을 마셔야 한다. 와인은 그리스 사람들이 아이도스(aidos, 염치)라 일컫는 미덕, 즉 남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깨달음의 정수이다.’

   
▲ 패소로블스 와이너리 축제에서 입장객들이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다. © 황상호

준비 운동 끝, 2차는 위스키

와인으로 입가심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위스키다. 위스키는 와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포도 부산물을 짜낸 뒤 천연 향신료를 첨가해 증류기로 끓여낸 것이 위스키다. 이 때문에 지역 와이너리에는 증류주를 파는 디스틸러리(Distillery)가 동생처럼 함께 있는 곳이 많다.

지역 위스키를 한 번에 즐길 방법이 있다. 나만 알고 싶은 축제다. 매년 8월 열리는 패소로블스 ‘디스틸러리 트레일’(Distillery Trail)이다. 김삿갓처럼 호리병에 술을 담아 마시며 걷는 하이킹 코스냐고? 지역 바텐더에게 그런 것이냐 물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놉!’(Nope)

축제 기간에 지역 디스틸러리 연합에 가입한 디스틸러리에서 40달러짜리 동판을 사면 디스틸러리 십여 곳에서 대표 증류주를 맛볼 수 있다. 오렌지 향이 가득한 브랜디를 파는 펜드레이즈 디스틸러리(Pendray’s Distillery), 알싸한 마늘 향과 고추 향이 나는 브랜디가 있는 마누치 스피리츠(Manucci Spirits), 창업주 둘의 성을 따서 이름 지은 크로바 크래프트 디스틸러리(Krobar Craft Distlillery)가 있다.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는 진, 어느새 옆에 있던 여성을 임신시켜버릴 수 있다는 매혹의 술 데킬라, 비단결 부르주아 분위기가 풍기는 코냑 등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되는 ‘모오든’ 증류주가 판매된다. 가게에서 술을 사면 칵테일 레시피도 준다. 운 좋으면 디스틸러리에서 갓 증류한 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볼 수 있다.

위스키 시음과 와인 시음에 차이가 있다. 와인은 다른 술을 따르기 전 그 전 술과 향이 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잔을 물로 헹궈야 한다. 이른바 린스(Rinse)다. 하지만 위스키 시음에는 린스가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알코올이 강해 잔향이 바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디스틸러리 와인 샤인(Wine Shine)의 바텐더는 손님에게 술을 따를 때마다 남아 있는 술을 가게 바닥에 척척 던지듯 버렸다. 집에서 그랬다간 등짝 스매싱 감이다.

증류주의 또 다른 이름은 스피리츠(Sprits)다. 한 방울 술을 뽑아 내기 위해 양철 증류기에 오랫동안 각종 재료를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가게마다 증류기에 별명을 붙여 놓았다. ‘페이션스(Patience, 인내)’, ‘섹시해지자(Be Sexy)’ 등 다양하다. 디스틸러리의 개성을 가늠할 수 있다.

술을 마신 뒤, 바텐더에게 디스틸러리 트레일 참가자에게 배포하는 동판을 건네 주니 망치로 꽝 동판에 인증 마크를 찍어준다. 그렇게 바텐더가 주는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대학 시절 생일주처럼 훅하고 올라올 수 있다. 그럴 때는 혀끝만 살짝 대고 향만 느껴보라. 술에 안개처럼 깔린 허브 향을 느낄 수 있다. 디스틸러리 리파인드(Re:Find) 바텐더 켈리는 “증류주에 들어간 허브는 대부분 인근 지역에서 생산한 유기농 재료”라며 지역 부심을 드러냈다.

“증류주를 만들 때 캘리포니아에서 재배되는 산약초가 들어가. 세이지(Sage), 주니퍼(Juniper), 여바 샌타(Yerba Santa), 페넬(Fennel) 등 말이야. 캠프파이어 할 때 이 술을 마시면 그만이지.”

   
▲ 디스틸러리 와인 샤인. 걸쭉한 목소리의 바텐더가 축제 참가자의 동판에 방문 인증 도장을 찍고 있다. © 황상호

와인을 품은 맥주, 그대는 누구인가?

이제 3차다. 술은 이때를 위해 마시는 것 아닌가? 다음날 최고의 온천욕을 위해 맥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이 지역에는 미국 대표 브루어리인 파이어스톤 워커 브루어리(Firestone Walker Brewery)가 있다. 라거와 크래프트 맥주뿐 아니라 와인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 맥주가 일품이다. 피자와 파스타, 타코 등 먹을거리도 다양하다. 이밖에 다운타운에는 수제 맥줏집인 토로 크릭(Toro Creek Brewing Co), 실바 브루잉(Silva Brewing), 어스 앤 파이어 브루잉 컴퍼니(Earth and Fire Brewing Co) 등이 있다.

여러 컨테이너로 쌓아 올린 푸드홀, 틴 시티다(Tin City)도 흥미로운 곳이다. ‘틴’(Tin)이라는 말 자체가 ‘깡통’ ‘통조림’이란 뜻이다. 지역 바텐더 추천으로 가봤는데 규모 있는 부지에 양조장과 와이너리, 파스타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등이 여러 컨테이너 안에 각각 배치돼 있다. 배럴하우스 브루잉 컴퍼니(Barrelhouse Brewing Company)에서는 신맛이 나는 사우어 배럴 에이지드 맥주가 인기다.

한 잔 두 잔 술에 젖다 보면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모를 물아일체 경지에 오른다. 이제 대문호가 될 급행 티켓을 얻은 것이다. 이제 이성적 예술신 아폴론은 떠나보내고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는 비 조형적 예술신 디오니소스를 모실 시간이다. 마셔라,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진즉 말하지 않았던가.

‘춤추는 짜라투스트라, 날개로 신호를 보내는 가벼운 자, 짜라투스트라. 모든 새에게 신호하면서 비상할 준비를 갖추는 자, 준비를 끝낸 비상 대기자. 다시없는 행복의 방탕자-.’

다음날 해장 온천이다. 패소로블스 3대 온천 중 하나인 리버옥스 온천(River Oaks Hot Springs)이다. 유료 온천으로 1인당 16~22달러다. 허브 마사지와 돌 마사지, 피부 비용 서비스가 강점이다. 개인 욕조 20개가 실내외에 설치돼 있다. 보글보글 끓는 탕에 몸을 녹이고 자연 바람을 맞다 보면 정신이 좀 들어온다. 온천에 와인도 판다.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마시자. 세상 이렇게 완벽한 페어링은 없다.

   
▲ 리버옥스 온천 야외탕. 실내에서는 피부 미용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 황상호

** 황상호는 <청주방송>(CJB)과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한 뒤 LA 민족학교에서 한인 이민자를 돕는 업무를 하고, 우세린은 <경기방송> 기자로 일한 뒤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업무를 한다.


편집: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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