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태 칼럼]

열심히 해보려다, 혹은 조금 더 잘 만들려고 하다가, 별의 별 사고가 일어난다. 황당한 오보나 인터뷰 조작 같은 일도 원래는 뭔가 더 잘 해보려던 것이 출발이었다. 막상 사건이 터지고 나면 ‘내가 왜 그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기자로 일하던 동안 참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봤다. 조금 더 빨리 보도하기 위해서, 조금 더 제작을 잘 하기 위해서 무리를 했다가 이른바 본전도 못 찾는 경우 말이다. 언론윤리라는 게 누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으면 불필요하거나 탁상공론, 혹은 신기루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문제가 되면 어지간히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도 잠깐 언급하지만 어떤 경우는 조직 내에서 징계를 당하거나 심지어 쫓겨나기도 했고, 사회적으로는 개인적인 지탄을 받는 것은 물론 언론계 전체를 욕먹게 만든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한두 번 무리한 시도를 했다가 별 일 없이 지나가면 다음엔 더 대담한 시도를 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면 막상 문제가 터졌을 때 뾰족한 대처법을 찾기도 어렵다.

아래 글은 필자가 언론중재위원회가 발행하는 「언론중재」 2020년 봄호의 “Journalism & Ethics” 코너에 쓴 글이다. 좀 더 제작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노력이 자칫 선을 넘었을 경우에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도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원론적으로 윤리적 선은 아예 넘지 말아야겠지만, 윤리적 선을 넘는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미리 예측해보는 것을 제작 프로세스에 반영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책일 것이다. 단비 독자들을 위해 「언론중재」 편집팀의 동의를 받아 전재한다. (편집자)


기자·PD들의 고민스런 속사정…‘물 먹지 말고, 제작도 잘 해야’

▲ 심석태 교수

시청자나 독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자들이 일상적으로 어떤 압박과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는지 말이다. 남들은 알아낸 것을 나만 알아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압박감. 똑같은 것을 남들은 똑 떨어지게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을 나는 밋밋하게 둘둘 말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 경력이 쌓여도 이런 본질적인 부담감을 극복하기는 어렵다. 현역을 떠난 지금도 느낌이 생생할 정도다. 시사적 사안을 다루는 PD들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전통적 의미에서 저널리스트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속사정은 다 비슷한 셈이다.

시청자나 독자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실상 이렇게 기자나 PD들을 압박과 스트레스에 내모는 것들이 한 발만 떨어져서 보면 별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현역을 떠났다고 이렇게 속 편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승부를 거는 것처럼 매달리는 것들은 아주 작은 팩트 한 조각, 화면 한 컷, 멘트 하나 등등이다. 기자나 PD들은 그것이 전체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처럼, 심지어는 몇 프레임에도 집착하듯 매달리기도 한다.

생생한 인터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신문은 그래도 좀 낫지만 방송에서 인터뷰는 타협하기 어려운 항목이다. 나 또한 10초도 안 되는 인터뷰 하나를 위해 반나절 이상을 투자한 적도 있다. 지금은 그나마 전화 인터뷰가 자리를 잡아서 부담이 좀 줄었지만 제대로 된 얘기를 해줄 인터뷰이를 찾아서 직접 육성을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은 전혀 줄지 않았다. 데스크도 마찬가지다. 뭔가 좀 더 딱딱 떨어지는 멘트나 사례 찾아낸 것 없어? 인터뷰도 좀 넣고 그래야 아이템이 생생해지지 않아? 이렇게 밋밋하게 만들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겠어? 이런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간 날이 얼마나 될까.

이런 분들에게 그런 인터뷰나 사례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당신을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볼 것이다.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제작 완성도는 그냥 장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언론 현장에 무지하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일 뿐이다. 물론 이런 치열함이 없다면 우리가 매일 만나는 뉴스나 지면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울까. 아니, 도대체 그 긴 뉴스 시간과 넓은 지면을 채우기나 할 수 있을까. 이런 노력을 통째로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진짜 너무한 일이다.

‘윤리적·법적 문제’가 터지기 전과 후의 상황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해당 보도나 프로그램에 대해 윤리적, 법적 문제가 제기되어 논란이 벌어지거나 언론중재나 소송이 제기된 뒤 당사자들을 만나보면 거의 모두가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하필 그 컷을 왜 넣어가지고, 모자이크를 조금 더 강하게 해서 아예 못 알아보게 했어야 하는데, 굳이 그 사례나 내용은 언급 안 했어도 되는 건데, 등등.

▲ 언론인들은 보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열에 아홉은 문제가 된 부분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아예 덜어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 Pixabay

만약 영화 <어바웃타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시간을 특정 시점으로 되돌리는 재주가 있어서 보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열에 아홉은 문제가 된 그 부분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아예 덜어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기억은 없다. 원래 보도 취지는 정당했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했더라면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자책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 법적, 윤리적 문제의 발생을 피할 수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좀 다르게 말해보자. 이 시점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몇 프레임의 화면이나 멘트, 사례 같은 것이 만들어낼 제작 완성도의 차이는 중요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대부분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수정하거나 아예 빼버리고도 같은 취지를 담아서 보도할 수 있었다. 그럼 애당초 그렇게 보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윤리적, 법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의사결정 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 기자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조금은 허무할 수도 있는 얘기를 하나만 더 해보자. 편집회의에 모인 수뇌부가 어떤 기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논의를 하는 그 순간에도 담당 기자는 관계자 멘트 한 마디를 받아내기 위해 길바닥을 헤매거나 전화기를 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생생한 화면을 위해 모자이크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적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자료화면 한 컷이라도 더 찾으려 아카이브를 뒤진다. 막상 편집회의에서 다른 아이템을 채택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고무풍선 터지듯 한 순간에 사라진다. 어지간한 핵심 사안에 대한 기본적인 보도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거칠게 말해 ‘보도를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일 수도 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당기자나 데스크는 ‘지금 큐시트에 잡혀 있는 그 아이템’을 더 잘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더 잘 만들기 위한’ 노력이 종종 사고를 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제작적 측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들이 종종 <콰이강의 다리>처럼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폭약을 내장한 보도물을 만들게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무사했던 기억이 누적되면서 잘못된 관행도 깊어진다. 누군가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그 다리가 폭탄을 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한다.

잘못된 노력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MBC <PD수첩>이 인터뷰이 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일은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공익적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느냐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친 집값 문제’를 생생하게 파헤치겠다는 의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건 단지 이런 질문을 던져보기 위해서다. 이미 서울에 제법 비싼 아파트를 계약한 취재원을 무주택 세입자인 것처럼 인터뷰해서 내보내기로 했을 때, 이것이 드러날 경우 발생할 윤리적 비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을까? 이 인터뷰이 때문에 조작 논란이 생기면 <PD수첩>이라는 브랜드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봤을까?

▲ MBC가 무주택자 인터뷰 조작 논란을 일으킨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의 제작진과 간부들을 지난 2월 14일 인사위원회에 회부했다. ⓒ SBS 뉴스

제작진의 해명을 보면 해당 취재원이 아직 등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형식적으로 무주택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법 비싼 아파트를 계약했다. 그것만으로도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의 답답한 심정을 설명하는 인터뷰이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누군가는 했을 것이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제동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 인터뷰이가 <PD수첩>과 인터뷰한 사실과 집을 산 얘기를 커뮤니티에 올리지만 않았어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제작진이 계산에 넣지 못한 몇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서 스위치가 작동했고, 폭탄은 터졌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기 전과 후의 상황은 극적일 정도로 판이하다. 폭탄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PD수첩>은 훌륭한 문제의식에 완성도 높은 제작성까지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담당 PD는 감봉 징계를 받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으며 CP와 본부장까지 징계를 받았다. 본부 차원의 사과문이 올라왔고, 프로그램 진행자도 사과를 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거론될 가능성이 높다. 제작진이 지금 방송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 후폭풍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인터뷰를 사용했을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냥 그 인터뷰를 사용하면서 모자이크 처리해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편법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PD수첩>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자.

이런 일이 <PD수첩> 만의 문제도 아니다. 신제품이나 서비스 소개 리포트에서 마땅한 일반 소비자를 찾을 수 없다고 홍보팀 직원을 동원했다가 경을 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방송통신심의위에 안건으로 올라갈 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까? 설마... 적당한 일반 청년 인터뷰이를 섭외하기가 여의치 않자 직전까지 인턴 기자로 일하던 사람을 일반 청년으로 둔갑시켰던 신년 기획 리포트도 있었다. 덕분에 신년 벽두부터 메인 앵커는 허리 숙여 사과를 했다. 그것이 그 정도로 문제가 될 줄 알았다면 당연히 다른 인터뷰이를 찾거나, 아니면 그냥 딱 떨어지는 인터뷰 없이 보도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심지어 고발성 시리즈 보도물의 여러 인터뷰를 기자가 자기 목소리로 직접 녹음한 뒤 다양하게 음성변조해 사용한 상상을 초월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딱딱 맞는 인터뷰를 무조건 넣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출발했을 수 있다.

신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광우병 논란 속에서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소비자를 찾지 못하자 동행한 인턴 기자와 함께 소비자로 변신했던 일간지 취재기자도 있었고, 몇 년 전에 찍은 태풍 사진을 송고해 1면에 실리게 한 사진 기자도 있었다. 모두 누군가 눈치 채고 문제제기하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묻혔을 것이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지면을 잘 꾸며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누가 알겠어’ 하는 근거 없는 만용이 초래한 일이다. 여기서 사례로 든 일들의 후과는 다들 작지 않았다. 개인과 언론사 모두에게 말이다. 자신의 회사와 프로그램 신뢰도에 누를 끼쳤고, 개인적으로는 크고 작은 징계를 받았고, 아예 직장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윤리적·법적 검토’가 의사결정 과정에 포함되어야

언론인들이 애초에 일을 배울 때 취재와 제작의 완성도에 대한 측면과 함께 윤리적, 법적 선을 넘었을 경우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 충분히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일이 지금처럼 자주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넘으면 안 되는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도 많지만, 그래도 앞에서 예로 든 사안들의 경우는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단지 문제가 될 가능성, 그리고 문제가 됐을 때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 관련된 사람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고려가 반영되기 어려운 의사결정 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언론인들에게는 애초에 일을 배울 때부터 윤리적, 법적 선을 넘을 경우 치러야 할 비용에 관한 충분한 교육이 필요하다. ⓒ Pixabay

다시 이 글 첫머리에서 했던 얘기로 돌아가 본다. 이젠 타사가 딱딱 아귀가 맞는 인터뷰나 사례를 찾아내 완성도가 거의 예술인 리포트나 프로그램을 만들었더라도 쉽게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데스크도 ‘경쟁사는 저렇게 딱 부러지는 사례와 인터뷰를 넣어서 잘도 만들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밋밋하게 만들었느냐’고 현장 기자나 PD를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현장 기자나 PD가 딱 부러진 사례와 아귀가 착착 맞는 인터뷰를 갖고 오면 그냥 ‘저 친구 참 능력이 대단하네’ 하고 감탄하기에 앞서 어딘가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봐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작품이 <콰이강의 다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속도나 제작 완성도 같은 것과 함께 법적, 윤리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는 계산법을 일상화하는 게 안전하다. 어느 중견 언론인이 잘 지적한 것처럼 이제 언론윤리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존재로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누구도 문제가 터지기 이전으로 시간 여행을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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