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태 칼럼]

언론윤리 문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온다. 그야말로 ‘언론윤리는 사치재가 아니라 언론인을 위한 생존재’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것이 현업 언론인들의 무신경, 무책임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까? 이 모든 문제를 그 기사에 관련된 몇몇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도 되는 일일까? 당장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시 저널리즘의 기준을 다시 논의하고, 지키지 않으면 언론으로 서로 인정하지도 않을 최소 기준을 세우고, 언론 소비자들에게 분명하게 자신들의 업무 방식과 기준을 밝히고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래 글은 필자가 중견 언론인들의 연구단체인 '관훈클럽'이 발행하는 「관훈저널」 2020년 봄호 권두시론으로 기고한 것이다. 「관훈저널」의 동의를 받아 전재한다. (편집자)


동네북 신세가 된 저널리즘

▲ 심석태 교수

저널리즘이 동네북 신세다. 저마다 언론이 문제라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외국에서 누군가 우리나라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마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언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으로 언론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언론이 처한 상황은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나다.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언론이 겪었던 비판과 최근 언론이 받고 있는 공격과 불신은 차원이 다르다.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기레기’라고 불리며 비판을 받은 것은 궁극적으로는 언론의 품질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언론의 참사였고, 언론사들과 언론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언론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부정당하고, 불신 받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취재하고 보도해도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기도 한다. 명백한 사실 보도조차 해석의 영역으로 넘겨버리거나, 보도된 내용이 아니라 보도의 의도를 따지면서 보도를 정치의 영역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무슨 문제를 언론이 제기하면 그 사안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보도를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지난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내연하던 문제가 사회 전면에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지켜만 보는 언론 관련 단체들

언론 내부도 덩달아 혼란에 빠져있다. 취재 보도의 기준이 무엇인지,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조차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언론인들 사이에 ‘언론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막막함과 두려움, 무력감을 호소하는 언론인들을 많이 만났다. 마치 영점이 잡히지 않은 총을 들고 사격대회에 나선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런 혼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시장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언론사와 언론인도 있다. 목소리 큰 몇몇 사람들이 언론 영역과 정치 영역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면서 언론인도, 언론 소비자도 헷갈려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각종 언론인 단체들이 무슨 책임 있는 대응에 나섰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언론 관련 학술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디지털과 AI 등 기술 변화에 따른 미디어의 산업적 변화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일회성 토론회 한두 번 여는 것은 ‘그래도 뭔가 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이상의 의미는 없다. 기술적 차원의 저널리즘 품질을 따지거나 혁신을 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 관련 단체들이 너무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의 비상한 상황에 비춰 보면, 집단으로서의 언론인은 마치 감각을 잃어버린 듯 너무나 태평해 보인다.

냉정한 판단 통해 해법 찾아야

디지털 전환과 같은 산업적 문제는 어쨌든 종국적으로는 개별 언론사들 사이의 실력대결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디지털 기술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시장에 참여한 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저널리즘 자체의 위기는 언론계 공통의 과제이고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다들 언론이 문제여서 사회가 혼란스럽다고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정말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금 언론에 대해 제기되는 각종 비판의 목소리는 본질적으로는 매우 정치적이다. 언론에 대한 공세는 그것이 어떤 방향에서 제기되는 것이든 ‘왜 언론이 나와 우리 집단을 이렇게 대하는가.’, ‘나와 우리 집단에게 이렇게 비판을 들이댈 수 있는 언론의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인가’로 모아진다. 최근 서로 다른 광장에 모여 언론을 비판하는 목소리의 공통점이다. 각기 다른 광장에 모인 대중이 모든 언론과 언론인을 향해 ‘너는 누구 편이냐’를 묻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의 관행’ 같은 말로 더 이상 이런 질문을 넘어설 수는 없다.

▲ 문제는 언론이 때로는 이쪽 편으로 보이는 보도를 하고, 때로는 저쪽 편으로 보일 수 있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 보수의 구별을 넘어서는 ‘언론의 정체성’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 Pixabay

문제는 언론이 때로는 이쪽 편으로 보이는 보도를 하고, 때로는 저쪽 편으로 보일 수 있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 보수의 구별을 넘어서는 ‘언론의 정체성’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직접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최근 몇몇 언론사 내부에서 벌어진 내홍은 ‘누구 편’을 넘어서는 ‘언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의 영역과 언론의 영역이 일부 겹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언론을 사실상 정치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정치화하더라도, 언론과 정치는 구분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종국적으로 같은 지점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원칙과 기준 전면적 재점검 필요

‘언론의 정체성’은 진보·보수·공영·민영 등등의 구분을 넘어서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말한다. 어떤 경향성의 차이, 소유구조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 다른 어떤 사회 영역과 내용적으로, 절차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본질적 특질이 ‘언론의 정체성’이다. 그럼 그런 ‘언론의 정체성’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결국은 언론이라는 것이 어떤 목표와 사명을 공통으로 추구하고 있고, 가장 기본적인 업무 수행의 원칙은 어떠한 것이며, 적어도 이것에 위배되는 것은 언론 행위가 아니라는 기준을 사회적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윤리강령과 취재준칙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이 있고, 신문협회 차원의 신문윤리강령도 있다. 각 사별로도 윤리강령과 취재준칙, 제작 가이드라인 등이 있다. 하지만 자살보도준칙이나 재난보도준칙과 같이 목적이 분명한 일부 기준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강령과 준칙들이 제대로 언론인들의 일상 업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언론계 내부에서조차 이렇다면 일반 사회 구성원들이 언론의 작동 원칙이나 업무 수행 기준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원칙과 업무수행 기준이 통째로 불신 받는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원칙과 기준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최근 일부 언론사들이 윤리강령과 취재준칙을 재정비하는 작업을 벌였다. 현재의 문제에 대한 매우 이성적이고 합당한 대응이다. 하지만 몇몇 언론사의 노력만으로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이제는 한국의 언론계 전체가 나서야 한다. 결국은 주요 언론단체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단체들을 중심으로 언론인 집단이 힘을 합쳐서 ‘언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를 넘어서는 언론의 본질에 관한 원칙을 정립하고, 이를 수행하는 절차적, 방법적 기준을 재정립해야 한다. 자신에게 불편한 기사라도 이런 원칙과 기준을 따랐다면 적어도 존중은 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잘 풀면 새로운 기회 맞을 수도

지난해 KBS에서 벌어졌던 김경록 씨 인터뷰 논란은 윤리강령과 취재·제작 준칙을 책 한권 분량으로 만들어놓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성원들이 투명하게 공유하고, 나아가 시청자와 사회 일반이 공감하지 않는 한 실제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언론사들이 저마다의 훌륭한 기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언론계 전체가 언론으로서의 최소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뉴스 소비자들도 ‘최소한의 기본을 갖춘 언론’과 자신들의 정치 활동을 언론으로 포장하는 ‘사이비 언론’을 구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

2020년 한국 저널리즘이 처한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한국 저널리즘의 기회이기도 하다. 저마다 언론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저널리즘의 중요성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이 이런 어려움에 처한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기간 언론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차분하게 잘 풀어간다면 디지털 기술 발전 속에 혼란에 빠졌던 한국의 저널리즘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한국 언론이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반전의 계기를 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편집 : 민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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