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국가의 의무’

▲ 방재혁 기자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 우리나라 역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난세를 극복한 영웅들을 품고 있다. 국가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에 등장해 결국 국가와 국민을 구해내는 영웅담을 들으면 애국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끓어오른다. 대중은 시대를 막론하고 위기가 발생하면 영웅을 갈망한다.

전국을 넘어 전세계로 퍼진 코로나19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언론은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감염자와 사망자는 늘어간다. 희망이 절실한 순간 언론은 미담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대구로 몰려든 의료인들, 동네 경찰서에 마스크를 기부한 지체장애인, 거액을 기부한 연예인들 이야기는 떨고 있는 민심을 진정시킨다. 그들은 자연스레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헌신한 영웅 취급을 받는다.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가짜뉴스가 비판받고 있지만, 영웅담도 본질을 흐리고 있다. 가짜뉴스가 약물 오용이라면, 과한 미담 보도는 진통제 남용이다. 진통제는 고통을 줄여줄 뿐 병을 낫게 하지 못한다.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교수는 놀라운 헌신으로 시민들 가슴을 울렸지만, 우리나라 응급실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 교수의 헌신과 노력을 부각하는 보도에 가려 정작 응급체계 개편에 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영웅이 외상센터를 떠나면서 논의는 없던 일이 됐다.

▲ 코로나19 사태 이후 연예인들이 얼마 기부했다는 등 미담 기사가 줄을 잇는다. ⓒ TV조선

사태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퍼지는 훈훈한 소식에 시민들은 잠시 통증을 잊는다. 미담의 주인공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헌신을 폄하하자는 의도는 더욱 아니다. 영웅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런 영웅을 보며 시민들은 용기를 얻고 힘을 보탠다. 그렇게 숱한 위기를 극복해왔다. 언론은 영웅을 시민들에게 알려서 위기 극복에 기여한다. 

그러나 언론이 튼튼한 사회안전망 등 근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를 비판하기보다 미담 소개에 치우친다면 어떻게 될까? 재앙은 되풀이되고 언론은 ‘인재’(人災)라는 해설 기사를 또 쓸 것이다. 이순신 같은 영웅이 등장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만큼 조선의 군정이 문란하고 국방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지만 수많은 백성이 육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7년간 유리걸식했다. 난세가 영웅 탄생의 조건이라면 영웅이 없어도 좋으니 치세를 살고 싶은 게 민중들의 소망이다. 

국가 스스로 영웅이 될 수는 없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6항에 따르면,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가 예방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영웅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국가는 영웅이 등장할 필요 없는 사회체제를 갖추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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