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소리로 보는 세상

▲오동욱 PD

카페는 조용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면서 집 근처 카페 단골이 됐다. 점원이 간간이 외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같은 소리를 빼면, 사람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 10곳’에 든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들리는 소리는 타닥타닥 터지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들릴 듯 안 들릴 듯 작게 튼 배경음악뿐이다. 

카페의 침묵은 누가 강제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라는 이름은 조용함이라는 현상 때문이지 그곳의 정체성이 스터디 카페이기 때문은 아니다. 가끔 터져 나오는 전화 소리나 사람 말소리에도 눈살 찌푸리는 사람이 없다. 침묵이 강제된 게 아니라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카페에 홀로 와서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자판이나 두드리다가 나가길 반복한다. 카페는 강제하지 않아도 침묵하는 공간이다. 

▲ 카페의 침묵은 누가 강제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Pixabay

소음의 양에 수치를 매길 수 있다면, 일상생활 영위에 소비해야 할 최소치는 얼마가 될까? 친구간 통화, 가족간 대화, 사업상 소통,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다와 연인끼리 속삭이는 귓속말까지 사회구성원을 연결하는 기본적인 소통에는 소음이 필요하다. 그 최소치는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종일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카페의 침묵에도 소음을 소비하는 공간은 있을 것이다. 모두가 무선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이나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공간인 이 카페에도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나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는 가상이고, 현실은 자연자원이 고갈된 재난 속 세계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은 가상세계에 몰려 산다. 그래서 현실은 적막하고, 가상은 시끄럽다. 이곳 카페도 매트릭스 같은 곳이 아닐까? 몸이 머무는 카페는 적막하지만, 카페 와이파이로 연결한 가상세계는 시끄러울 것이다. 사람들 노트북에는 여러 창이 떠 있다. 유튜브 세계도 있고, 카카오톡 세계도 있다, 모든 세계는 여러 화면에 띄워져 동시에 유영한다. 더 많은 소음 속에서 더 빨리, 그리고 더 넓은 범주의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카페로 모인다. 카페는 그저 그들의 육체를 의탁하는 공간일 뿐이다. 현실세계의 침묵은 가상세계의 더 많은 소음을 위해서다. 저들은 과거 어느 순간보다 많은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 사태로 독서실과 연습실이 문 닫아서인가? 2020년 봄, 카페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시생, 취준생, 연습생 같은 각종 ‘미생’ 얼굴을 하고 있다. 모두가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전자기기를 바라본다. 노트북, 핸드폰, 패드 같은 전자기기에서는 공시카페, 인터넷 강의, 영상 편집기, 유튜브가 발하는 빛이 흘러나온다. 그들 귀에는 각종 소음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살기 위해 들어야만 하는 소리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소음에 시달린다.

생존을 위해 소음에 시달린다면, 그들은 본의 아니게 어쩌다 소음에 노출된 이들과 다르다. 생존이라는 폭력이 그들의 귀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위력은 성폭력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ASMR이 유행이다. 일정한 소리로 소음에 지친 정신을 힐링한다는 것이 소구 포인트다. 소리 디톡스인 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꿈꾼다. 결핍은 그래서 창조의 원천이라고 한다. 저편에서 보면, 그것은 끝없는 경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춘래불사춘’이라 했던가? 2020년 봄은 조용하지만 소란하다.


편집 : 이정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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