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오수진 기자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 펴낸 책 <위험사회>를 통해 ‘빈곤은 위계적이고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빈부격차는 계층별 삶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만들지만 기술발전과 산업화에 따른 위험, 예컨대 기후변화와 대기오염, 원전사고 등의 재난은 계층에 상관없이 닥친다는 얘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서구로 퍼지면서 영국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와 보리스 존슨 총리, 미국 영화배우 톰 행크스와 리타 윌슨 부부 등이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은 그가 말한 ‘재난의 민주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벡은 그러나 이런 사회적 재난에 대응하는 부담은 각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문제도 지적했다. ‘재난 대응의 개인화’는 코로나 사태 와중에서 우리 사회에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재택근무를 해도 꼬박꼬박 봉급이 나오는 정규직 노동자나 원격근무가 가능한 전문직 등은 현 상황에서 크게 곤란하지 않다. 반면 상점, 식당, 택시, 택배노동의 현장 등에서 대면 접촉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겐 위험을 벗어날 다른 선택지가 없다. 매장 고객이 줄고 거래처 주문이 끊겨 당장 임대료를 걱정해야 하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 입이 바짝 마른다.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숙인과 결식아동은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 코로나19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영국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도 지난 24일 확진 판정을 받고 스코틀랜드 자택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 KBS

그래서 벡은 이런 위험이 일상화하거나 더 크고 새로운 재난이 닥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각 나라와 국제사회가 ‘리스크 관리’를 위한 대응과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사태는 그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가 당장의 재난은 물론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정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확진 환자가 1만 명에 육박하고 사망자가 140명대를 기록하는 동안 우리 질병관리 시스템은 신속한 검사와 격리통제, 효율적 환자관리 등으로 비교적 잘 대응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지금보다 커지거나 더 심각한 보건재난이 닥쳐도 잘 해 낼 수 있을까. 전체 병상의 10%에 불과한 공공병원과 의료인력 부족 등을 감안할 때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경주 지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등 지난 수 년 간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허술한 재난 대응 시스템을 거듭 드러냈다. 그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명분 없는 규제완화와 허술한 관리감독 탓에 꼭 필요한 안전장치가 누락되는 것, 법정 피난시설과 비상대피 훈련조차 무시되는 것 등 고질적 부조리와 직무유기가 여전하다. 임박한 기후위기와 원전밀집도 세계 1위 국가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사능 재난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총체적으로, 긴박하게 대응 시스템을 확충해야 한다.

그 중 빠져선 안 될 것이 장애인, 이주노동자, 홀몸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긴급한 상황에서 필요한 지원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재난안전법을 보강하는 일이다. 또 당장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실직자, 구직청년, 영세자영업자 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재난기본수당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재난수당은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으로 닥치는 재난의 해일 앞에 우리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방파제를 쌓을 수 있기 바란다.


편집 : 권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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