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강도림 기자

학창 시절 국어 과목은 늘 내 전체 성적을 끌어내렸다. 특히 문학 쪽이 ‘쥐약’이었다.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데 답이 있다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내가 느끼기에 주인공의 심정이 ‘슬픔’일지라도 선생님이나 해설서에서 ‘비장함’이라 한다면, 난 틀린 것이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서 ‘보라색은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고 배웠다. 그에 대해 황당하다며 ‘그냥 보라색을 좋아해서 썼다’고 답한 작가의 인터뷰는 내게 위안이 됐다. 이에 견주어 수학은 늘 문제의 정답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가 없었다.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기레기’라는 단어는 학창 시절의 ‘국어’ 같다. ‘기레기’가 되기는 싫은데 되지 않기 위한 명확한 길이 없다.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 저자들은 ‘10가지 저널리즘 원칙’을 제시했다. 기자는 진실을 추구하고,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감시자 역할을 하라는 것 등이다. 하지만 작년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에서 드러났듯, 각자가 추구하는 진실은 너무나 다르다. 각 진영에게 ‘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을 묻는다면 그 답은 다를 수밖에 없다.  

▲ 각자가 추구하는 진실이 다른 상황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 pixabay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SNS 게시물의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기레기’가 가장 많이 언급된 해는 작년이었다. 특히 조국 이슈가 한창이던 9, 10월 두 달 동안 2019년 전체의 40%가 집중됐다. 언급 횟수만 놓고 보면 대부분 문 대통령 팬덤에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국 이슈로 국론이 찬반양론으로 나뉜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진보와 보수 진영, 서로의 ‘입맛’에 맞지 않는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는 그들에게 ‘기레기’다.

문제는 ‘기레기’라는 용어가 뉴스가 아닌 기자를 향한다는 점이다. 기자가 쓴 기사가 아닌 기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자의 작업 결과인 기사와 기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기자를 쓰레기에 빗대 그저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임을 드러낸 셈이다. 공격적인 언사를 날리는 대신 생산물과 생산자에 관한 평가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대도 건설적인 비판과 인신공격을 구분할 수 있다. ‘기레기’라고 욕하는 자들은 충격요법으로 언론을 깨우치려는 선한 의도를 가졌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레기’라는 욕은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모욕적인 비난일 뿐이다. 언론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비난이 아닌 비판이 필요하다. 비판은 이성적 작업으로 더 나은 방안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비난은 합리적인 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상대가 잘못되었다며 공격하는 데 목표가 있을 뿐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은 마지막 항목으로 다음 사항을 명기했다. ‘뉴스 생산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뉴스에 관해 권리와 책임감을 동시에 가진다.’ 뉴스 수용자들은 언론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건설적인 대안이 함께 해야 한다.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기레기’라고 폄하하는 것은 권리와 책임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편집 : 윤재영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