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위기와 혁신] ⑭ ‘줄 세우기’로 왜곡된 시험제도

부산의 한 국립대 정치외교학과를 지난해 졸업한 허원혜(26·취업준비)씨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대해 “시험을 위한 교육이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학교 시스템이 전부 수능에 맞춰져 있었고 1년에 2~3번씩 있는 전국 모의고사와 시·도 교육청 모의고사뿐만 아니라 별도로 사설 입시학원 모의고사도 수시로 봤다”고 회고했다. 이어 “시험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고 미래가 결정될 거라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극심해 기숙사에서 한 번 기절한 적도 있고, 깜깜한 운동장에서 혼자 울며 소리를 질렀던 경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남지역 농어촌 자율학교를 나온 허씨는 한국 교육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깜깜한 운동장에서 울며 소리치게 만드는 교육

“주변에 시험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요.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인권 의식이 높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친구들이요. 지금 한국 교육의 시험제도는 이들의 잠재력을 전혀 발굴해내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입시를 통해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좋게 평가 받은 경험이 거의 없어요. 학생의 다양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 시험으로만 인재를 가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득보단 실이 많다고 생각해요.”

▲ 대구시 수성구의 한 입시학원에서 대입 수험생을 대상으로 ‘3모(3월 모의고사)’, ‘6모’, ‘9모’ 등에 대비하는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다. ⓒ 장은미

서울의 한 여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졸업을 앞둔 나한솔(24‧가명)씨는 시험제도에 잘 적응해 비교적 좋은 대학에 진학한 사례지만 “지금의 객관식‧암기식 시험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평가가 점수 내기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생각의 깊이를 쌓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며 “학창시절 10년 동안 시험점수를 올리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했는데, 차라리 책을 깊이 읽는다든지 신문을 꾸준히 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경남 거제시의 일반고 3학년인 윤종혁(19)군은 학교가 시험 결과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집에서 거리가 조금 먼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경쟁률이 4대 1정도 되는 기숙사 입사를 배치고사 성적순으로 정하기 때문에 어느 시험보다 떨리고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방과 후 강좌, 특별심층학습, 진학상담 등의 기회도 시험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덧붙였다.

모든 시험이 향하는 곳은 ‘대학입시’

교육과정에서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크게 ‘학습 성취도 확인’과 ‘선발’로 나뉜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교에서 시험은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학생을 변별(좋고 나쁨을 가림)하고 서열을 매기는 데 지나치게 쏠려있다. 이런 평가제도는 학생들을 일찍이 ‘승자’와 ‘패자’로 나누면서 극소수 상위권을 제외한 대다수 학생들의 학업성취와 자존감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 사회에서 지방대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과도하게 나타나고 지방대생 스스로도 열패감을 갖는 것은 이렇게 승자와 패자, 계급을 나누는 시험제도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2017년 전국 초‧중‧고등학교 31곳의 학생‧학부모‧교사 2323명을 설문조사해 분석한 ‘한국의 시험문화와 학습자에 대한 영향’ 보고서에는 교육 수요자들 상당수가 시험의 목적을 ‘대학입시’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고서에 따르면 ‘매우 중요한 시험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학생의 55.8%가 ‘상위 교육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라고 응답했고, 49.8%가 ‘학생들이 배운 것을 평가하기 위해’라고 답했다(복수응답).

▲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 상당수가 시험의 목적을 ‘상위 교육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 강찬구

특히 고2 학생들의 경우 무려 65.8%가 ‘상위 교육 단계 진학’을 시험의 목적으로 꼽았다. 학부모 역시 62.3%가 진학을 시험의 목적으로 꼽았다. 보고서는 “시험의 본질적 목적은 학습의 점검과 이해도에 관한 평가에 있지만 (교육 수요자들은) 상위 단계로의 진학, 특히 대학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보다 현실적인 시험의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또 학생‧학부모‧교사 64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는 ‘시험의 공정성’이며 교사는 등급을 조정하기 위해 극도로 난해한 문제를 출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평가가 다양한 방면의 능력보다는 지식적인 측면에만 더 집중하게 되고 학생들은 희망하는 대학 진학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거의 학습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고 비판했다.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경쟁심, 이기심 등이 심화하고 학교폭력, 왕따, 게임 중독, 상실감, 무기력증 등이 주된 시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부 포기하고 싶게 만든 ‘수능 31번 문항’

시험이 ‘변별’에 치중하느라 정작 교육적 가치를 훼손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킬러 문항’이다. 이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출제한 초고난도 문제를 말한다. 한 예로 지난 2018년 말 치러진 2019학년도 수능 국어 31번은 뉴턴의 만유인력 가설에 대한 정보를 해석하는 문제였는데, 지나치게 긴 지문에 ‘구껍질(공 모양의 얇은 껍질)’, ‘질점(물체의 크기를 무시하고 질량이 모여 있다고 보는 점)’ 등 어려운 개념과 용어가 많아 정답률이 18.3%에 불과했다. 당시 이 문제는 유시민 작가가 티비엔(tvN) 방송 <알쓸신잡3>에서 “국어 문제가 아닌 물리 문제”라고 비판하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수험생의 기대와 달랐던 부분에 대해 유감”이라고 발표하는 등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 많은 논란을 낳았던 2019학년도 수능 국어 31번 문제. 이런 문제들을 ‘틀리게 만들기 위한 킬러 문항’으로 부른다.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19학년도 수능을 거쳐 충북의 한 국립대에 진학한 박진실(20‧가명)씨는 “평소 국어 성적이 1~2등급이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도 국어 31번 문제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며 “국어 문제는 원래 보기와 지문을 잘 이해하고 서로 의미를 연계해서 풀어야 하는데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파악하고 의미의 연관성을 따지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구본창(43) 정책국장은 “시험이 입시 변별력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정답률이 굉장히 낮고 전문가들도 못 풀 만큼 어려운 킬러문항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평가를 통해 역량을 제대로 살펴보는 데 주목하지 않고 학생들 간의 상대적 위치를 보는 데 중점을 두는 게 과연 좋은 시험인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만 돼도 평가에 따라 ‘위너(승리자)’와 ‘루저(패배자)’로 서열이 구분된다고 생각하고, 성적이 중하위권인 학생은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열패감과 상실감으로 학습에도 굉장한 악영향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구 국장은 “소화할 수 없는 시험이 계속되면 아예 공부를 포기해 버리고 학교 수업과 평가에 대한 만족도, 목표의식, 자아효능감도 떨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 ⓒ 장은미

‘5지 선다’ 시험으로는 사고력과 창의력 못 길러

객관성‧공정성을 갖추며 변별력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5지 선다 객관식’으로 시험을 획일화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출제자가 규정한 조건 내에서만 정답을 골라야 하므로,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경숙 교육학 박사는 <시험국민의 탄생(2017)>에서 “객관식 문제의 대표적 형식인 선다형 문제는 인간의 연속적 사고를 분절해 제시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앎을 빈약한 암기활동으로 전락시켜버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시된 예시, 정해진 답변을 찾아 소거하거나 암기해내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사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에 이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김진숙(55)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교육서비스본부장은 지난 4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우리 교육은 학생들에게 미래형 인재가 되라고 하며 자기주도적 활동, 참여형 학습, 다른 사람에게 공감‧협력하는 감성지능 개발 등을 강조하지만 정작 시험은 암기‧이해와 같은 저차원적 인지능력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인공지능‧로봇 같은 첨단기술 혁신이 일어날 미래 시대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인간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 텐데, 학교 수업과 평가를 통해 그런 가치를 배우고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이 사회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세계의 교육 선진국은 국가 수준 대입 시험에서 대부분 사고력과 창의성을 평가할 수 있는 서술형 문제를 낸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14년에 낸 ‘대학입시 정책의 국제 비교연구’에 따르면, 한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핀란드, 호주, 일본, 중국 가운데 선다형 시험만을 보는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프랑스의 대입시험 바칼로레아, 영국의 A-레벨, 독일 아비투어, 핀란드 일리오필라스툿킨토는 논술형, 서술형 시험을 본 후 ‘절대평가’로 채점해 성적 변별보다는 대학 수학 역량을 갖췄는지 확인하는 성격이 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대입관련 모든 시험이 ‘객관식 상대평가’인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한국 교육이 일본 교육을 모방하고 참고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각국 대입시험 방식 비교표.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은 대부분 논술형, 서술형 시험을 함께 시행하고 있다. © 강찬구

자기 생각 표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시험제도로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대한민국의 시험> 등의 저자인 이혜정(49)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은 “우리 학생들에게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길러지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역량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능력을 잘한 것으로 인정해줄 지가 학생들의 공부법과 능력을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이 소장은 “5지 선다형인 수능이 사고력을 측정한다고 하지만 결국 누군가 정해놓은 생각과 의견을 정답으로 맞추는 사고력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며 “객관식 문제에선 ‘다음 중 옳은 것’을 묻는데, 어제 옳았던 게 오늘 틀릴 수도 있고 다른 사회에서는 다를 수도 있으므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논리를 개발하는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 두 아이를 보면서 학교의 평가방법에 따라 세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고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어요. 한국 공립학교를 다니는 둘째 아이는 역사적 사건의 연도를 외우지만, 한국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제주 국제학교에 간 첫째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공부하더라고요. 마찬가지로 우리 시험은 동학혁명이 언제 일어났느냐를 물어보지만, 논술형인 국제 바칼로레아(IB) 역사시험은 ‘동학혁명이 일본의 조선병합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2시간 동안 논하라’라는 문제가 나와요. 이런 문제를 풀려면 주체적인 생각과 논리적 근거가 필요하죠. 그러면 학생별로 수준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만의 생각을 써보고 발전시킬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이혜정 교육과 혁신 연구소 소장 ⓒ 장은미

우리나라에서도 객관식 상대평가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청와대, 교육부, 더불어민주당 등이 비공개협의회를 갖고 오는 2028년도부터 수능에 서술형 문항을 도입하는 방안 등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교육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의 김진경 의장도 최근 수능 서술·논술형 문항 도입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고 대구와 제주교육청은 지난해부터 국제 바칼로레아를 한국어화해 공교육에 도입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시험은 토론중심 수업과 논술·서술형 평가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 공인 평가·교육과정으로 스위스 비영리 교육재단 IBO(International Baccalaureate Organization)가 운영하고 있으며 전 세계 153개국 5000여 개 학교에 도입됐다.

공정 채점을 위한 장치와 수업개혁 지원도 필요

이혜정 소장은 “(이런) 새로운 시험이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술형 평가를 시행하는 나라들이 전문 인력을 동원해 체계적으로 채점하고 교차 검증하는 노하우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70만명이 응시하는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전국 고교 교사 17만명이 응시자 이름을 가린 채 채점하며, 채점자에 따라 점수 편차가 클 경우엔 조정위원회에서 재검토하고 조정한다. 60만 명 이상이 응시하는 국제 바칼로레아는 신청 교사들 중 채점자를 선발해 채점 표준화 훈련을 받게 하고, 답안지 사이에 미리 채점된 ‘스파이’ 답안지를 섞어 교사들이 일관성 있게 점수를 주는지 점검한다. 또 1차 채점이 이뤄진 답안지를 감독관 채점자가 2차 채점하고 점수 차이가 크면 다시 채점하는 절차를 두었다.

구본창 정책국장은 “학교에서 지금 당장 서술형 평가를 도입하면 오히려 그 시험에 대비하는 사교육이 팽창해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시험제도가 바뀌기 위한 여러 환경을 마련하는 로드맵을 만들어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히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생이 진로에 맞는 교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고교학점제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만큼 객관식 상대평가인 수능을 확대하기보다 토론‧실습 중심 수업, 논술‧서술‧프로젝트형 평가를 할 수 있는 입시 정책을 일관성 있게 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 국장은 또 “교사들의 과도한 행정업무를 줄이고 교육 과정과 평가에서 높은 전문성과 재량권을 갖도록 지원해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높여야한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미국의 하버드 등 선진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수도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교육의 품질과 상관없이 ‘지잡대’ 등으로 싸잡아 부르며 멸시하고 차별하는 풍토가 심하다. 지방대생들이 편입 등을 통해 서울로 ‘탈출’하는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저출산 추세로 학생 수가 점점 줄면서 지방대 중 상당수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와 <단비뉴스>는 심층기획 ‘지방대 위기와 혁신’을 통해 서울 중심의 불균형 발전과 왜곡된 학력 경쟁 등이 낳은 지방대 소외의 실상을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

편집 : 유연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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