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김용락 시인, 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
주제 ① 문학과 정치

문학으로 인연 맺은 ‘자발적 극빈자’

“이분은 ‘자발적 극빈자’예요. 마지막 돌아가시던 2000년대쯤 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작가가 돼요. 1년 인세가 1억씩 들어와요. 그래도 이 사람은 여전히 코딱지 만한 집에 살았어요.”

▲ 권정생 작가는 <몽실 언니> <강아지똥> 등 유명 작품을 남기고 많은 인세 수입을 얻으면서도 숨질 때까지 작은 흙집에서 지냈다. ⓒ 안동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인 김용락 시인은 평생 독거노인으로 가난하게 살다 간 동화작가 권정생을 추억하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을 시작했다. 김 시인은 2007년 5월 17일 권정생 선생이 숨을 거둘 때 곁에서 임종을 지켜봤다. 그가 안동공고 영어교사로 일하던 때다. 권 선생이 위독하다는 연락에 안동에서 그가 입원해 있는 대구까지 서둘러 갔다.

“아파서 입원했는데 젊은 의사들이 (권정생의 몸에) 뭐가 달렸거든. 이게 뭐냐고 물었나 봐요. 열여덟 살 이후로 소변을 한 번도 성기로 못 눠서 흘러내린다고 했더니, 의사들이 그건 옛날이고 지금은 수술하면 된다며 약을 투입했어요. 그게 부작용을 일으켜서 돌아가시게 된 거예요. 울었어요. 저도 사람 죽는 걸 가까이에서 처음 봤는데…”

권정생 선생은 십대 후반에 신장결핵을 앓았다. 그 탓에 몸에 항상 고무호스를 연결해 소변을 받을 수 있는 비닐 주머니를 차야 했다. 노동도 어려워 그는 ‘교회종지기’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면사무소에서 보리쌀과 밀가루, 연탄을 타서 쓸 정도로 가난했다. 그는 모아둔 원고료 12억원과 책 인세를 어린이들에게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용락 시인은 권정생 선생의 임종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문학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중에 상주 없이 자기 이름만 적힌 관 사진을 다큐멘터리 방송에 자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김용락 시인이 ‘문학과 정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임지윤

계엄령에도 책 놓지 않은 문학청년

김용락 시인은 1958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서 태어났다. 1984년 창작과비평사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가 출간돼 문단에 올랐다. 그는 안동에서 중학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은 서울로 진학하려고 두 번이나 도전했지만, 결국 대구로 진학하게 됐다. 그는 계명대 영문학과에 다니면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겠다는 각오를 했다. 1980년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계엄령이 내려진 때였다. 휴교였지만 그는 책을 빌리기 위해 학교로 갔다. 무장한 군인들이 학교를 에워싸고 지키고 있었다. 여차하면 군인에게 끌려가 징역 살거나 고문받을 수도 있었다. 그때 계명대를 지키던 해병대 장교 중 그를 알아본 이가 있었다. 고향 친구의 형이었다. 그 덕분에 도서관에 잠시 들어갈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일직교회라는 데 갔어요. 요즘은 시골 교회도 크고 멋지지만 낡아빠진 시골교회예요. 담장도 없고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르고 있더군요. 대문은 열려있는데 높은 종탑이 있어요. 자전거 끌고 들어가서 보니 왼쪽에 기와집이 있는 거예요. 시골 초가집인데, 갈 때까진 ‘이분이 동화작가니 흰 와이셔츠 입고 포마드 기름 바른 인텔리겠구나’ 이런 상상을 하고 들어갔어요. 당연히 기와집에 있는 줄 알고 기와집을 향해서 ‘여기 권정생 집사님 계십니까’ 물었더니 아무도 안 나와요. ‘여기 혹시 권정생 선생님 계십니까’ 하니까 그제서야 문이 열리더니 젊은 분이 나오시는 거예요.”

살아서 거부하고 죽어서 더 큰 상 받은 권정생 

▲ 김용락 시인이 권정생 선생의 생애와 문학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 임지윤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은 김 시인 고향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김 시인은 대학생 때 권정생 선생을 찾아가게 됐다. 수박 한 덩이를 자전거에 싣고 책에 나온 주소지로 갔다. 그는 “동화 작가가 바로 이웃 동네 살고 있단 걸 알고 너무 놀랐다"며 “시골에 살았기에 시인이나 소설가를 한번도 본 적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용락 시인은 안동 사투리로 “누구니껴” 하면서 권정생 선생이 얼굴을 내비치던 첫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김 시인은 “깡마르고 뻐드렁니도 나고 형편없이 생겨서 놀랐는데 방에 일본 책들과 톨스토이 전편이 있어 또 한번 놀랐다"고 회상했다. 당시 시골에는 책 있는 집이 드물었다. 김 시인이 들어가 본 권 선생의 방은 남루했다.

“후지카 곤로(풍로)에다 이 분이 노란 냄비로 밥을 해먹고 밥을 남겨놨는데, 냄비 속으로 숟가락 젓가락을 꽂아 놓은 거예요. 곤로 밑에는 양철 쓰레받기가 있는데 오래 써서 새카맸어요. 그 위에는 걸레를 짜서 얹어 놨더라구요.”

권정생 시인이 맨손으로 종을 친 이유

김 시인은 권 선생에게 “소설가를 꿈꾼다”며 유식해 보이려고 사르트르나 카뮈 이야기를 꺼냈다. 권 선생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그게 문학이랑 어떤 관련이 있는고”라며 반문했다. 헤어지면서 권 선생은 김 시인에게 동화책 <사과나무 밭 달님>을 건넸다. 당시 권위있는 출판사로 통하던 ‘창작과비평사’에서 낸 책이었다. 김 시인은 “시골 거지 영감 책을 거기서 내주었지만 계속 어렵게 살았던 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사과나무 밭 달님>이 ‘아동도서 분야 노벨문학상’으로 통하는 라가치상의 픽션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종지기로서 임무를 경건하게 수행했다. 겨울에는 종을 치는 줄에 서리가 끼어 있는데도 교회 장로가 사준 목장갑조차 끼지 않고 종을 쳤다.

“내가 따뜻한 손으로 종을 치면 헐벗은 사람, 아픈 사람 귀에 들리겠나? 맨손으로 치고 종탑에서 자기 방으로 돌아올 때 보면 새벽 서리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달빛에 반사돼서,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그 길을 걸어온다는 거예요. 이후 모든 소설, 동화 주요 주제가 이거였어요. 맨손으로 내가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 김용락 시인의 강연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저널리즘스쿨 학생. ⓒ 임지윤

잡지 월간 <샘터>에 권정생 선생이 쓴 글이 실렸다. 자신이 헛간에 살면서 새벽종 치는 일을 한 이야기를 담았다. 김 시인은 “허술한 헛간이지만 거기 사는 값으로 새벽마다 종을 쳤다"며 “겨울 새벽에 따뜻한 옷 입어도 떨리는데 내복도 없고 폐병까지 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고 말했다. 

1995년 권정생 선생은 새싹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권 선생 뜻과 맞지 않는 일이었다. 수상자에게 미리 의사를 묻지도 않고 신문에 보도됐다. 권 선생은 상을 주겠다고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냈다. 그는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 위해 뭘 한 게 있다고 돌려받느냐”며 상도 도로 부쳐버렸다고 한다.

“저 같으면 돈 2천만원이 탐 나서 못 이기는 척 받을 것 같아요. 보통 세속적으로 살잖아요. 그런 일화를 접할 때는 머리 위에 얼음물 한 바가지 확 덮어쓰는 것 같더라고요.” 

김용락 시인은 “보통은 서로 상 받으려고 정치도 하는데 그는 전혀 그런 면이 없었다”며 “권정생 선생과 동시대에 산 걸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련을 극복한 ‘도종환’의 문학적 삶

▲ 김용락 시인이 동료인 도종환 시인의 시련과 작품을 소개하며 ‘문학적 삶’을 얘기하고 있다. ⓒ 임지윤

김용락 시인은 두 번째 소개하고 싶은 인물로 지금은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을 꼽았다. 그는 지금 세종시에 포함된 부강중학교의 도종환 교사가 시인으로 등단하고자 대구로 자신을 찾아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을 토론하던 때를 회상했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뒤에 수많은 언론이 사라지게 됐어요. 전두환이 ‘일도일사(一道一社)’ 원칙에 따라 각 시도에 <매일신문> 같은 지방지 하나 정도 남겨두고 다 없앤 거예요. 저는 그래도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시집을 통해 김지하, 신경림, 이시영 등 스타 시인들 틈에 끼어 등단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서울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이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충북 청주에서 알지도 못하는 세 사람이 나를 찾아온 거예요. 그중 한 명이 도종환이었어요. 통금시간이 넘도록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는데, 얼굴이 벌게지면서 ‘아직 등단 못 하고 열심히 혼자서 문학을 공부중인데 같이 동인지를 만들어 보자고 하는 거예요. 1984년 1월 <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출간하게 되죠.”

▲ 1980년대 <풀빛 판화 시선>을 시작으로 판화를 삽화로 쓴 동인지들이 많이 출간됐다. <분단시대>는 문학활동을 통해 분단 시대의 한국을 재인식하자는 취지로 발간됐다. ⓒ 합동 북

<분단시대>는 김용락, 도종환, 김창규, 배창환 등이 1983년 결성해 1984년부터 4년간 발간됐다. 창간호 <이 땅이 하나 됨을 위하여>에는 ‘고두미 마을에서’ ‘울타리 꽃’ ‘진눈깨비’ 등 도종환 시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여럿 나온다. 하지만 서울대 학생회에서 이 책을 필독도서로 선정하면서 국가안전기획부가 판매금지를 하고 도 시인도 사찰을 받게 된다. 당시 도종환 시인은 ‘울타리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울타리 꽃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이다. 눈먼 남편을 대신해 죽고 마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긴 무궁화 전설을 바탕으로 쓴 시다. 권력에 대한 저항과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끈질긴 민중 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렵게 등단한 도 시인에게 큰 시련이 찾아온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암에 걸려 죽고 만 것이다. 항암치료를 하려면 배 속 아이를 포기해야 하는데 아내는 치료받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1986년 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접시꽃 당신>에서는 같은 이름의 시는 물론이고 ‘병실에서’ ‘암병동’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당신의 무덤가에’ ‘옥천에 와서’ 등을 통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드러낸다.

▲ 1986년 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한 도종환의 두 번째 시집 <접시꽃 당신>. ⓒ 실천문학사

이 시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100만 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 당시 그는 충북 청주 중앙중학교 교사로서 충북지부장을 맡았다가 해직된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해 1527명의 교사를 교단에서 쫓아낸 것이다. 그는 복직을 위해 단식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투옥까지 된다. 그 사이 정권이 두 번 바뀌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전교조가 합법단체임을 인정받으며 그는 10년 만에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한다. 하지만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에 걸려 어렵게 복직한 학교를 그만두고 속리산에 들어가 산방 생활을 하게 된다.

문학과 정치의 닮은 점, 성찰과 질문

“문학이란 건 초심을 지키고 어떤 게 우리 사회에 도움되는지 생각하며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는 거예요. 그 속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건가 묻게 되죠. 이러한 삶의 태도는 여러분 같은 언론인이나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현실 정치인에게도 필요한 거죠. 문학과 정치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쓴 ‘소명으로서 정치’라는 신념윤리, 책임윤리와 맥이 닿는다. 자기가 출마를 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대 상황과 민족, 역사에 부합하며 정치사회를 발전시켜야 하는 소명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보수가 우세한 대구에서 개혁적 성향으로 국회의원과 교육감 출마 경험이 있다. 그는 “주위에서 ‘이상주의자’라고 욕하지만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100번 떨어지고 박살 나더라도 나가서 붙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마했다”며 “집안이 힘들어질 만큼 어려웠지만 시를 쓰는 시인이기에 세상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주관적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김 시인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소개하며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에게 늦더라도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가라고 조언했다. ⓒ 임지윤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조급해 하지말라” 

마지막으로 김 시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급해하지 말고 자기 길을 걸어가라”며 봄이 아니더라도 자기 계절에 맞게 피고 지는 ‘꽃’과 같은 삶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된 권정생 선생과 국회의원으로 활동중인 도종환 의원은 모두 가난하게 자랐다”며 ”그러한 삶 속에서 오는 단련이 어른이 된 뒤 계속된 시련을 버틸 수 있게 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사 세 가지 큰 재앙이 있는데, 가장 큰 재앙이 ‘소년 급제’”라며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다가 한꺼번에 무너진 우병우와 달리 흔들리는 삶 속에서 꽃을 피워낸 도종환처럼 일찍 성공하려고 너무 열망할 필요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9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원종원, 안치용, 이택광, 김용락, 권순긍, 조문환, 조효제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양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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