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 윤상은 기자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의 한 광장에 여성 섬유노동자 1만 5000여명이 쏟아져 나왔다. 환기도 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다 화재로 떼죽음 당한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의 임금(빵)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선거에 참여할 권리(장미)를 달라고 요구했다. 1912년 매사추세츠 주 섬유공장 파업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 구절을 따서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고 쓴 손팻말을 들었다. 이후 빵은 ‘생존권’, 장미는 ‘행복추구권’의 상징이 됐다.

소설과 영화로 눈길을 모은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도 빵과 장미를 갈구하는 여성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 둔 김지영은 ‘빵집 알바를 해서라도’ 자기 손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경제활동이라는 ‘빵’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하고 싶은 이유가 돈벌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세계지도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던, 직장에서 ‘능력 있다’ 인정을 받았던 그에게 일은 자아실현과 행복 추구의 통로다. 이런 김지영에게 ‘남편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먹고 사는 여자’ ‘유모차 끌고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맘충’이라는 주변의 비아냥은 영혼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만 주어진 김지영은 빵도 장미도 박탈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사회에서 요행히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온전한 ‘빵’을 보장받고 있는 것일까. 2017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34.6%다. 남자가 평균적으로 100만원을 받을 때 여자는 65만 4천원을 받는다는 얘기로, OECD 30여개 회원국 중 가장 격차가 크다. OECD 평균은 13.8%인데, 한국 외에 남녀 임금격차가 30%를 넘는 나라는 없다. 남녀가 주로 일하는 업종 차이 등을 감안해도, 성차별 요인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숫자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동시에 정치, 행정, 사법부와 대기업 등의 고위직에 여성이 임용되면 뉴스가 될 만큼 우리 사회 ‘힘 있는 조직들’의 ‘유리천장’도 아직 견고하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7.1%로 OECD 평균 28.8%보다 10%포인트 이상 낮다. 한국 기업 이사회의 여성이사 비율은 3.1%로 OECD 평균 20.6%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에 여성 이사를 최소한 1명 두도록 권고하는 ‘소심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그 마저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발표한 성격차지수(GGI)에서 우리나라가 153개국 중 108위를 차지한 것은 정치·경제 부문에서 한국 여성의 권한이 남성보다 두드러지게 낮은 탓이다. 이런 유리천장은 한국 여성들이 ‘장미’를 갖는 것을 방해한다.

▲ 지난 10일(현지시간) 선출된 핀란드의 새 총리 산나 마린(34)이 12명의 여성 장관 등 새 내각구성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 KBS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경제발전과 인권 수준 등에서 앞서가는 나라들은 여성들이 빵과 장미를 갖는데 걸림돌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제도와 관행을 수술했다. 최근 34세 여성 산나 마린을 총리로 선출하고 19개 부처 장관 중 12명을 여성으로 기용한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WEF 등이 발표하는 통계에서 ‘가장 남녀차별이 적은 곳’으로 꼽히는 이 나라들은 행정부와 의회 등의 고위직에 여성을 일정 비율 할당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갖게 된 여성들은 국공립보육시설 확충과 ‘아빠 육아휴직 의무화’ 등 남녀 노동자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아이 돌보는 아빠를 의미하는 스웨덴의 ‘라떼파파’ 등 북유럽 복지사회의 풍경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우리 사회도 이런 개혁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행정, 입법, 사법부 고위직에 적극적으로 여성을 임용하고, 대기업의 여성이사 할당제 등도 과감하게 도입해야 한다. 여성 한 둘을 ‘장식’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여성 집단에 주어 ‘빵과 장미의 걸림돌’을 제거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82년생 김지영과 그 선후배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들의 남편, 자녀, 부모도 함께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편집 : 윤재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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