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돈’

▲ 신수용 기자

"나는 가족 전용 현금 출납기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직장의 ‘부장님’ 얘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저녁 없는’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내 나이대 자식과는 서먹서먹하다고 했다. 용돈 줄 때 말고는 자식들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대리님’은 아기가 자신을 볼 때마다 운다고 했다. 해뜨기 전 나가 밤늦게 집에 가니 아빠를 낯선 사람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 아빠 얘기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는 주말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밖에 나가자고 졸랐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몇 시에 집에 오냐”는 아빠의 채근 전화를 받은 게 대화의 거의 전부였다. 엄마도 아빠와 대화가 뜸해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주말에는 아빠 홀로 집을 지키기 십상이다. ‘나가봐야 돈만 쓴다’는 게 아빠의 지론이다.

▲ 육아는 아이들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이기도 하다. © Pixabay

처음으로 아빠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영화 <기생충>을 보러 가자고. 아빠는 벌떡 일어났다. 동네 영화관이어서 나는 집에서 입는 운동복 차림으로 나갈 참인데, 아빠는 정장을 하고 현관을 나섰다. 아빠는 19금 장면이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콜라를 들이켰다. 영화관을 나와서는 국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는 분이 이탈리안 식당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빠는 몇 젓가락 안 되는 파스타가 비싸다고 불평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지난 6월 스웨덴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가 “한국은 아직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면 '출세를 포기한 남자'라고 할 만큼 직장에서 두려움이 있다”며 한국 아빠들도 용기를 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아빠들이 스웨덴처럼 라떼파파(한 손에 라떼를 든 육아하는 아빠)가 될 수 없는 건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돈 때문이다.

아버지들도 자식과 친해지고 싶다. 돈에게 자식과 유대관계를 쌓을 기회를 빼앗겼을 뿐이다. 한국인의 근로 시간은 몇 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 2위로 길다. 육아 휴직은 퇴사를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다. 특히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빠들에겐 육아휴직은 그림의 떡이다. 2017년 육아휴직을 신청한 아빠는 1만2천여 명뿐이다. 육아휴직을 용감하게 실행해도 문제다. 첫 3개월간 육아 수당 상한액은 150만원, 나머지 9개월은 120만원이다. 3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는 약 376만원이다. 엄마만 벌면 살림이 빠듯해질 위험이 있다. 여성 임금은 남성 임금의 68.8% 수준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자식 관계에 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 감독은 딸이 “아빠, 다음에도 또 놀러 오세요”라고 인사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집에 못 가는 날도 많은 영화감독의 일상이 어린 딸의 시선에서는 아빠가 집에 놀러 오는 손님처럼 보인 것이다. 가족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 정작 딸과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관계는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생계 최전선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밤낮 열심히 일하다가 자식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여유를 소진해버렸다. 육아는 아이들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 아빠가 라떼를 들고 내가 탄 아기차를 밀 수 있었다면, 연인과 헤어진 날이나 시험에서 떨어진 날 아빠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4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재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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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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