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마음’

▲ 임지윤 기자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행동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으로 수없이 되새긴 말도 네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진실은 강하고,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난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모든 걸 터놓고 얘기하면 네가 떠나갈 것 같았다. 혼자서는 밥도 잘 못 먹는 내가 ‘너 없이는 안 된다’고 하면 노랫말 가사나 읊는 사춘기 소년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마음’의 다른 말을 ‘생각’이라고들 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무의식에서 출발한다고 결론 내렸고, 철학자 데카르트는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을 존재 이유라고 단순화했다. 그런데 난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네게 어떤 말을 할지 생각했고, 결론은 ‘내 마음대로 하지 말자’였다. 내가 끝없이 생각한 이유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존재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너를 만난 처음엔 그랬다.

미안하지만 내 마음이 항상 너를 향하지는 않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나이만 먹었을 뿐 ‘사춘기 청년’이었다. 네 사소한 행동에 하루 종일 설렜고, 연락이 안 오면 마음을 졸였다. 티를 안 내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미 누군가에게 내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너를 좋아했던 여러 날 중 내 마음은 네가 아니라 힘든 내 외로움과 굳은 내 자존심을 배려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게 네 마음은 한결같았다. 나에게 보이는 호의는 누구에게나 베푸는 친절이었고, 나에게 짓는 미소는 그저 명랑한 성품이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인생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너와 나 역시 가까워질수록 멀어짐을 준비하는 비극이었다. ‘이별이 아름다운 건 다음 만남이 있기 때문’이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낭만적 대사는 판타지에 불과했다. 나는 네 마음을 착각하고 있었고, 결국 내가 쓴 소설은 누구도 읽지 않는 3류작으로 끝났다.

▲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 Pixabay

어쩌면 처음부터 한결같던 네 마음은 나를 더 키웠을지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 나는 충분히 아팠고, 그 아픔은 나를 성숙시켰다. 그래서 그 패턴을 교과서에 빨간 줄로 밑줄 치듯이 내 머릿속에 각인했을지 모른다. 그 아픔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더 괴롭게 끝내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게 희망고문 속에서 벗어나 나를 구하는 일이었으니까.

너에게 끝까지 관심 없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아니, 나는 너를 많이 좋아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나는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믿고 싶다. 그게 바보 같은 내 마음이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멍청했던 나는 행여나 이별에 아파할지 모르는 네 아픔보다는 내 몸에 붙어있는 내 마음을 먼저 봤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난 그 정도로 어리석었다.

미안하지만 끝까지 난 어리석게 살고 싶다. 네 덕분에 누군가를 쉽게 사랑하지 않겠다고 배웠고, 누군가의 사랑을 쉽게 판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너는 딱 그 정도였다. 그때도, 지금도 내 마음은 오로지 나로 가득 찼고 네 미래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이번에도 아픔은 나를 성숙시켰고, 그 덕분에 난 좋은 언론인이 될 것 같다. 진심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진실’은 보이는 것 저 너머에 있다고 믿게 됐다. 어떤 교육도 성장시키지 못했던 나의 해묵은 자존심을 너는 강하게 단련시켜줬다. 나에게 이제 세상은 좀 더 쉬워 보이고 고통도 견딜 만하게 느껴진다. “고맙다. 오늘도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을 수 있게 해줘서”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양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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