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⑳ 매헌 윤봉길

<앵커>

“중국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혼자 해냈다”. 시청자 여러분 혹시 누가 한 말인지 알고 계시는 지요?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이 한 말인데요. 장개석에게 감동을 안기고, 찬사를 받은 조선 청년은 누구일까요? 매헌 윤봉길입니다. 1932년 상해 홍구 공원에서 상해 주둔 일본군 지도부를 척살한 상해의거의 주인공이죠. 윤의사의 살신성인 의거가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은 널리 알려졌는데요. 투사에 앞서 시대를 고민하던 지식인이자 실천적 계몽운동가라는 사실은 덜 알려졌습니다. ‘사상가’이자 ‘의사’ 매헌 윤봉길의 삶을 김현균 기자가 조명합니다.

<리포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매헌 윤봉길의 생가. 비록 초가이지만, 드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말끔히 단장됐습니다. 배움을 열망하는 농민들을 위한 교육의 전당이었던 윤 의사의 생가.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도 농촌 계몽 운동에 주목합니다.

인터뷰) 관광객 심순옥(54)씨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농촌 계몽운동도 그렇고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그런 분이 계셨던 유적지에 와 볼 수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윤봉길이 1927년에 농민 교육을 위해 쓴 ‘농민독본’입니다. 농사기술을 가르쳐 단순히 농촌을 잘살게 하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나라의 주인이 농민이라는 점. 그 농민이 주인대접을 못 받고 멸시와 천대받는 현실. 나아가 농민이 살아나야 조선이 살아날 수 있다는 사상을 담았습니다.

인터뷰) 이성섭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농민독본) 세 권 중에서 1권은 한글 교습, 그때는 다들 한글을 몰랐거든요. 2권은 계몽편이라고 해서 일반 상식(을 다뤘죠). 3권은 농민의 살 길, 농민의 앞길이라고 해서, 농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농민은 단합해야 한다, 농사의 가치, 농민의 가치, 농민이 나갈 길에 대해서 책에 담았습니다."

윤봉길이 농촌운동에 눈을 뜬 계기는 19살 되던 해 만난 한 농촌 청년과의 만남입니다. 아버지의 묘를 가려달라며 주변의 묘표를 모두 뽑아온 청년. 글을 배우지 못한 농민과 농촌 현실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윤봉길은 일찍이 학교교육을 거부했습니다. 식민지 노예교육의 현실을 깨닫고 학교를 자퇴한 겁니다.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이 분명했던 청년 윤봉길은 새로운 길에 눈을 뜹니다. 일제교육이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교육, 소외된 농민을 위한 교육입니다. 1926년 고향인 예산군 덕산면에서 독서회 운동으로 농민계몽, 농촌부흥운동에 나섭니다.

인터뷰) 윤주경 윤봉길 의사 손녀(전 독립기념관장)

"우수한 아들이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니까 (윤의사의 부모께서) 좋아하셨던 거 같아요. 반대하거나 그런 경우는 없었던 거 같고,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리더 같은 역할도 하니까 좋아하셨죠."

하지만, 윤봉길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농촌운동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그리고 중대 결단을 내립니다. 본격 독립운동. 불과 23살이던 1930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이곳 고향에 남겨두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떠납니다. 이때 그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요.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임을 굳게 다짐한 겁니다.

인터뷰) 윤주경 윤봉길 의사 손녀(전 독립기념관장)

"(떠나기 전에) 어린 아들을 안고는, 아빠가 네가 마음껏 배울 수 있는, 네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셨대요. 윤봉길 의사가 얼마나 배움에 대해서 목말랐는지, 자기가 다 못한 배움의 길을 아들에게 열어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주로 가던 도중 일경에 붙잡혀 45일 옥살이를 한 뒤 다시 만주로 가는데 성공합니다. 대련에서 청도를 거쳐 임시정부가 있는 남쪽 상해까지. 현장에서 일을 해 번 돈을 노자 삼아 이듬해 1931년 5월 도착합니다. 프랑스 조계에 머물며 공장에서 일해 돈을 버는 한편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웁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연이 닿아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1931년 겨울 가입합니다. 이듬해 1932년 1월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거사를 벌입니다. 일제 심장부에서 일제 우두머리 천황 저격에 실패한 3달 뒤. 이번에는 윤의사에게 천금같은 기회가 옵니다.

인터뷰) 이성섭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그러니까 (윤 의사는) 1932년 4월 20일경에 일본 신문을 봅니다… 보니까 4월 29일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고,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승전기념식을 같이 할 때 일본 수뇌부들을 다 무찔러야 하겠다…"

뒤에 보시는 것처럼 역사 현장 홍구 공원은 오늘날 노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윤봉길의 호 매헌을 딴 정자와 기념관까지 들어섰습니다. 중국인들도 그만큼 윤 의사의 의거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겁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말에 이부분이 잘 설명됩니다. “중국군 100만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혼자 해냈다” 장개석은 이후 김구가 이끄는 한국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합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은 미국과 소련에 전후 조선의 독립을 제안합니다. 결국 한국독립은 윤봉길의 살신성인 독립투쟁에 그 뿌리를 둡니다.

인터뷰) 이성섭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그 당시 (윤 의사 의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투철한 확신을 못 가졌어요. 헛되이 죽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무감이나 자신감을 못 가졌죠. 그런데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한 후 다들 자신감을 갖게 됐고 그 후, 독립운동이 일대 전환을 이룹니다."

한국 현대사의 획을 가른 윤봉길이 일제에 총살형에 순국한지 87년이 지났습니다. 이곳 서울 양재동에는 윤봉길 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농촌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로 목숨을 바친 윤봉길의 숭고한 투쟁을 기립니다. 최근 불거진 일본의 경제도발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25살 꽃 같은 대한 청년 윤봉길이 남긴 이 한마디를 떠올려 봅니다.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어 떠나가오”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하는 우리 사회에 쓰린 회초리를 안깁니다. 단비뉴스 김현균입니다.

(영상취재, 편집 : 김현균 / 앵커 : 최유진)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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