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한끼, 맘 한끼] ⑰ '내게 필요한 인생의 맛' 작품 인터뷰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첫 구절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죠.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대로 살아가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사람에게 사회생활 잘한다고 말합니다. 한정된 시간에 주어진 일을 빈틈없이 해내는 이들에게요. 이런 사람은 사회가 만든 틀에 자신을 꾹꾹 눌러 담을 줄 아는 사람이죠. 그런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다 보면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해요. 내가 아닌 '틀' 그 자체가 되고 말죠.

▲ '내게 필요한 인생의 맛'을 경험하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 이현지

[몸 한끼, 맘 한끼] 여덟 번째 시간에는 '내게 필요한 인생의 맛'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먼저 현재 나의 스트레스 상황을 진단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작성했어요. 몸과 마음의 반응을 점수화하고 몸-마음 진단서를 작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필요한 인생의 맛’을 처방했지요. 

사전 작업을 마친 뒤 내게 주는 인생의 맛으로 오렌지를 경험해보았습니다. 밝은 주황색 오렌지를 여러 단면으로 자른 뒤 향도 맡고 맛도 보고 알갱이를 만져보기도 했어요. 상념은 저 뒤로 보내고 알알이 상큼함을 품은 오렌지를 온전히 느껴보았죠. 그리고 오렌지를 도구 삼아 흰 종이에 오렌지의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오렌지 단면에 물감을 발라 종이에 찍기도 하고 껍질을 길게 잘라 붓처럼 만들어 그리기도 했어요. 

▲ 지현 님의 작품에서 자연스러운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 이현지

오렌지아트 작업을 하며 과즙과 물감이 손에 찐득찐득하게 묻었습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이가 장난을 치듯 오렌지를 가지고 놀았죠. 스물 다섯 지현 님은 이 작업을 하며 “억압을 깬 것 같다”고 감상을 전했습니다. 작품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이 느껴지네요. 구체적인 형상은 보이지 않아요. 그저 오렌지가 가득 머금은 과즙을 표현한 것이 거든요. 오렌지의 우둘투둘한 면에 물감을 발라 종이에 굴리기도 하고 오렌지 단면을 찍기도 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기에 빨간색과 초록색, 노란색과 보라색 등 보색 관계의 색들을 써서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지현 님은 입사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스물 다섯 살 신입사원입니다. 자기진단 체크리스트에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하다고 썼는데요. 이번 작업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리기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먹기도 아까운 오렌지를 그림도구로 사용하는 행위도 억압을 깨는 데 도움을 줬다”라고 덧붙였죠. 의도를 가지지 않고 행위를 하는 것, 내면적으로 금기시 되는 일을 해보는 것이 지현 님의 단단한 틀을 툭툭툭 깨뜨린 것입니다.

▲ 스트레스를 체크하고 '내가 쓰는 진단서'를 작성했습니다. © 이현지

지현 님은 자신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현재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위험)이다. ‘완벽’하고자 노력하는데, 그것을 해내지 못할 때 갖는 실망감, 불안함이 큰 것 같다.”

그 아래에는 “일 욕심”이라고 쓰여있네요. 체크리스트를 보면 일 욕심에 의한 압박감으로 몸은 축축 처지는 피로함을 느끼고, 마음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득 찬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런 감정은 지현 님의 일 성향에서 기인합니다. 지현 님은 FM으로 살아가는 유형인데요. 회사 선배들이 “좀 쉬면서 해”라고 말할 정도로 업무시간에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죠. 그럴 때면 지현 님은 속으로 “오늘 빨리 끝내야 돼, 끝내야 돼”라고 되뇌고 있다고 합니다.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까, 혹여 실수할까 늘 불안한 마음을 갖고 일에 매달리죠.

강사 생강은 일상 속에서 패턴을 깨는 활동을 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일상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고, 그 패턴에 따라 특정 감정이 고착됩니다. 틀을 깨고 나와 감정을 풀어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오렌지아트 작업을 하기는 어려우니, 미술 작업처럼 관습을 깰 만한 활동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죠. 혼자 막춤 추기는 어떨까요. 자아의 틀이 강하면 혼자 있더라도 잘 안 될 거예요. 행위가 아니더라도 좋아요. 하늘을 날아 구름 위를 방방 뛰노는, 아이들이 할법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죠. 주어진 현실과 상관없이, 신나고 짜릿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볼 수도 있죠. 카메라 앞에 선 배우처럼요. 

▲ 일상에서도 오렌지아트와 같은 관습을 깨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 이현지

지현 님은 자신에게 이런 맛-처방을 내렸습니다.

"스스로 완벽하고자 하는 압박과 불안감이 가득 내재된 상태임.
실수에 대해 인정하고 마음을 가볍게 먹고자 노력할 것.
아니 노력하지 말고 좀 어느 정도 놓아볼 것.
이때 필요한 것은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 
음식은 와인 한 잔, 좋아하는 친구들과 먹는 곱창, 
달콤한 과일(복숭아)로 처방하겠음."

특정 상황에 매몰돼 있으면 고착된 감정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주어진 틀에 자신을 맞추는 삶에 몸과 마음이 지친다면 가끔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놓아주세요. 그리고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감정, 느낌을 따라가 보세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래요. 어려운 일이죠.
어렵지만 일상 속에서 가볍게 툭툭툭, 패턴을 깨보세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진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미술치유 프로그램인 [몸 한끼, 맘 한끼]를 진행하는 이현지 <미로우미디어> 대표는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학하면서 사단법인 <단비뉴스> 영상부장으로 일했으며 졸업 후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습니다. 미술과 영상, 글쓰기를 결합하는 컨셉트의 <미로우미디어>는 서울시의 도농연결망 '상생상회' 출범에 기여했고 <단비뉴스>에는 [여기에 압축풀기]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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