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관계’

▲ 홍석희 기자

교수님 방에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청소 아주머니가 교수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 같았다. 특이했다. 제자들 편지도 아닌 청소 아주머니 편지라니. 평소 교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대했기에 아주머니가 편지까지 썼을지 궁금했다. 나도 마주칠 때 가끔 인사는 드렸지만, 대개 그냥 지나쳤다. 아주머니가 손으로 써 내려간 마음과, 잊지 않으려 잘 보이는 곳에 간직하는 교수님 마음도 인상 깊었다.

‘관계’를 떠올렸다. 교수님과 청소 아주머니 관계.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그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드려본 적 없는 편지를, 아주머니가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존중’이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는 존중이란 그런 의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지은)은 건설회사 계약직으로 등장한다. 그는 학창시절 사채업자를 칼로 죽인 전력이 있다. 법원에서 정당방위로 인정했지만, 이미 세상은 그를 ‘살인자’로 낙인 찍었다. 한 직장에 융화되지 못한 채 여러 곳을 떠돌 수밖에 없다. 동료들도 소문을 들은 뒤 그를 멀리한다. 그러나 부장 박동훈(이선균)은 그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평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회식 날이면 그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꼭 건넨다. 드라마 말미에 이지안은 그 시간을 “21년 제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평생 존중받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같이 가자“는 말 한마디가 큰 위로일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이경규와 배우 류승수가 스무 살 청년을 찾아갔다. 대화 도중 류승수가 청년에게 “무슨 일 하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청년은 거부감 없이 대답했는데, 오히려 이경규가 학생 눈치를 살폈다. 이경규는 “예전에 홍대에서 꿈을 물었다가 혼났다, 왜 자신에게 꿈을 강요하냐고 하더라, 그 이후로 꿈을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류승수는 “내가 꼰대가 됐구나”라며 반성했다. 딸보다도 어린 학생 생각을 존중하는 이경규와 스스로 반성하는 류승수, 모두 ‘어른’스러웠다.

스물에는,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었다. 사람이 좋았고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을 정도로 열심히 사람을 만났다. 친구들 모임도 늘 주도하고, 동아리 활동도 성실히 했다.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행복한 추억도 겹겹이 쌓였다. 그러나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피로감도 작지 않았다.

▲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된다. ⓒ pixabay

서른 즈음에는, 친구만큼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와 ‘맞는’ 사람 한 명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마저 허무하게 멀어졌다. ‘내가 만나는 열에 둘은 나를 싫어하고, 일곱은 무관심하고, 하나는 좋아한다’고 했던가. 안 맞는 사람을 지혜롭게 대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결론은 ‘존중’이다. ‘과하게 알려고 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사람들을 대하기로 했다. 서른 살, 이립(而立). ‘마음이 확고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나이. 나는 지금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 서있다. 교수님 같은, 박동훈 부장 같은, 이경규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꿴 것 같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유연지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