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퍼펙트 월드’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의 돌봄 없이는 생물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는 인간 성격의 시원을 유아기 가족관계에서 형성된 무의식에서 찾는다. 가족과 더불어 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축적한 가치·문화·관습을 전승받기도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족은 내 삶을 규정하거나 확장하는 작지만 거대한 거점이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삶은 그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나 다름없다. 혼자 그런 노력을 할 수도 있지만, 어린 나이라면 우선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도움을 받지 못하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

세 남자의 연결고리

영화 <퍼펙트 월드>는 ‘사람의 성장에 주변 환경이 큰 작용을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초반에 유괴를 당하는 필립(T. J. 로더)은 광적인 여호와의 증인 편모의 억압으로 또래 아이들이 누리는 소소한 일상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 탈옥수 버치(케빈 코스트너)를 만나면서 할로윈 축제 사탕도 받아보고 유령 가면도 써보면서 그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 필립과 버치는 사건의 피해자와 피의자지만, 점차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 ⓒ 영화 <퍼펙트 월드>

버치 역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자라면서 청소년기에 이미 범죄자가 된 인물이다. 탈옥 후 도망가던 중 필립의 집에 숨게 되고, 필립한테 어린 시절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버치는 필립를 인질로 삼아 도주한다. 도주하던 중 필립을 해치려는 다른 흉악범을 쏴 죽이고 필립을 구한다. 이 사건 후 버치는 필립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뜻밖에도 필립은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버치를 따라간다. 

레드(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버치를 감옥에 보낸 경찰이다. 버치를 어릴 적부터 봐온 인물이다. 레드는 훈방해도 되는 조그만 죄를 지은 어린 버치를, 집에 보내면 주위 환경 때문에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 것이란 독단적인 판단으로 버치를 소년원에 보낸다. 레드는 그것이 ‘선의’라고 믿었다. 버치가 탈옥하자 그는 과거 자신의 행위가 옳았는지 자책하며 직접 그를 추격한다.

‘아버지’라는 함정

필립과 탈옥수이자 유괴범인 버치는 차를 갈아타고 물건을 훔치며 수사진의 추격을 피해 텍사스를 가로질러 도주한다. 필립의 얼굴에는 버치를 무서워하는 표정이 전혀 없다. 버치도 필립을 아들처럼 챙긴다. 종교적 규율만 강요하는 편집증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필립은 버치를 아버지처럼 여긴다. 오랜 수감생활로 굳어버린 버치도 필립과 도주 생활을 하면서 차츰 따뜻한 인간성을 되찾는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진 버치가 필립에게 ‘아버지’가 되면서 하나의 ‘가족’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도주 여정은 ‘여행’이 되고, 영화는 그들의 ‘퍼펙트 월드’를 담은 로드 무비가 된다.

하지만 필립과 버치가 그들의 여정에서 만나는 상황은 ‘퍼펙트’하지 않다. 그들이 도중에 만나는 가정은 모두 흠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난 사람은 어린아이가 차에서 콜라를 쏟았다며 심하게 나무라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 가족 없이 혼자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중년 여인, 아들을 학대하는 아버지 등이다. 거기에 가족은 없다.

사회에서 아이가 자립하는 과정

영화는 필립과 버치 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유대관계를 도주하면서 겪는 일상생활을 통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필립은 버치와 함께 콜라를 마시고, 할로윈데이에 한 가정집에 들어가 초콜릿을 얻기도 한다. 일반 가정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행위가 필립에게는 허락받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금지’된 것이었다. 버치는 이런 행위를 필립뿐 아니라 자기도 할 수 있고, 그 누구도 모두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며 필립을 격려한다. 그런 행위를 도와주는 버치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이다. 영화는 필립이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고 자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버치는 필립이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격려한다. ⓒ 영화 <퍼펙트 월드>

사라진 ‘퍼펙트 월드’를 복원하는 법

영화는 추격하던 FBI에게 버치가 총을 맞으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간다. 총상을 입은 버치와 필립이 수사관들에게 포위된 장면에서 버치는 필립한테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가족에게 돌아가던 필립이 뒤돌아서 다시 버치에게 뛰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필립은 또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필립에게 기존 가족은 ‘억압’이었고, 버치와 새로 형성한 가족은 ‘퍼펙트 월드’였다.

▲ 버치는 필립에게 부족했던 이상적인 ‘아버지상’이다. ⓒ 영화 <퍼펙트 월드>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드가 버치에게 ‘나를 아는가’라고 묻자, 버치는 끝내 그를 모른다고 답한다. 지금의 버치를 만든 건 레드의 선택 때문이었다. 레드가 버치의 가정환경을 파악하고 그를 진정으로 도왔다면, 레드도 버치에게 이상적인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레드는 끝내 버치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버치와 대극점에 선다. 이것이 1960년대 미국이 보여주는 ‘강한 아버지’ 상이다.

▲ 레드는 버치가 이런 범죄자가 된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쫓는다. ⓒ 영화 <퍼펙트 월드>

저격수의 정조준 사격은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함께 있던 필립을 피해 정확하게 버치를 사살한다. 순식간에 바로 눈앞에서 아직 어린 필립에게 ‘퍼펙트 월드’가 사라졌다. 그렇다! 이것이 현실이다. 영화는 관객이 영화 속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올 것을 강요한다. ‘퍼펙트 월드’를 꿈꿀 수는 있지만, 그것은 환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울한 결말이지만, 역설적으로 관객들이 그 세계를 더욱 열망하게 만든다. 이제 ‘퍼펙트 월드’는 어디 있는가? 관객들이 필립에게 응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필립아, 어서어서 자라렴. 네가 그런 아버지가 되어봐.”


편집 : 박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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