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⑲ 단재 신채호

<앵커>

(김현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최유진 기자 혹시 이 말 들어 보셨나요?
(최유진) 네, 시청자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말씀으로 알려져 있죠.
(김현균) 그렇습니다. 이제 정확히 3달 뒤, 11월 9일이면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의열단’ 100주년을 맞습니다. 조선의열단의 강령을 김원봉의 부탁으로 단재 선생이 써주셨죠.
(최유진) 네, 이 강령을 통해 김원봉을 비롯한 이육사, 나석주 등 피 끓는 조선 젊은이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항일 무장투쟁의 기치를 더욱 드높일 수 있었습니다. 
(김현균) 조선의열단 강령만이 아니죠. 단재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문학가, 언론인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강도적 침략 행위와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최유진)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단재는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차디찬 중국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셨는데요.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호적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재 선생이 순국 뒤, 70년이 넘도록 무국적자였던 이윱니다.
(김현균) 최근 일본이 대한국 수출 규제라는 경제 도발을 감행했는데요. 이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단재 선생이 남긴 글과 행동을 통해 짚어 보겠습니다. 임지윤 기자가 단재의 흔적으로 좇아 심층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대전시 중구 어남동의 단재 신채호 생갑니다. 아버지를 여의던 8살까지 이곳에서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단재’라는 호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몽주의 ‘일편단생’을 짧게 줄인 겁니다. 생가 앞에는 단재가 8살에 지은 한시가 소개돼 있습니다. ‘높고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고 가깝게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라는 신데요. 지난 3월 이낙연 총리가 이곳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돌아간다”며 감탄합니다. 이렇듯 단재는 뛰어난 한학자이자, 문학가였습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단재 신채호 기념관입니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업적을 정리한 여러 자료들을 전시 중인데요. 1923년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한 ‘조선혁명선언서’가 먼저 눈에 띕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한 달간 유자명 선생과 합숙하며 작성한 겁니다.

6,400자 선언서는 일제 타도라는 투쟁을 넘어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향점을 잘 담았습니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빼앗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먼저, 우리 주권을 빼앗은 일본을 강도로 규정하고, 독립을 제안합니다. 구체적으로 민중의 손에 의한 ‘5파괴’ ‘5건설’ 방법론을 내놓습니다. ‘5파괴’ 대상은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 노예적 문화사상입니다. ‘5건설’은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 민중,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홥니다. 의열 투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독립 운동가와 국민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습니다.

인터뷰) 윤석위 단재신채호 선생 기념 사업회 공동대표 - 조선혁명선언 의미

“요즘처럼 아주 ‘조선혁명선언’이 중요한 때가 없을 거라고 보입니다. 요즘 시기가. ‘조선혁명선언’은 1922년에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찾아와서 의열단 강령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죠. 그래서 그거를 1년에 걸쳐서 작성을 합니다. 1923년에 이거를 완성해서 ‘조선혁명선언’이라고 발표를 한 명문장 선언문이 되겠는데. 의열단의 생각, 의열단 김원봉의 생각과 단재 선생의 생각이 잘 집약된 선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과 갈등 같은 것들이 상해 임시정부 때 처음부터 시작됐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됨으로 해서 외교론, 준비론 뭐 이런 것들 보다 우리 민중에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막 장기간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하고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폭발적인, 혁명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되찾지 않으면 찾을 방법이 없는 것이라는 결정적 선언문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지금 ‘조선혁명선언’처럼 아주 명징한 문구로 우리를 단결해야 한다는 ‘단결 선언문’ 같은 깃발을 가지고 들고 일본과 싸우면 우리가 정신적인 우위를 가지고 일본 민족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겨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서 ‘조선혁명선언’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단재의 이런 철학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집약돼 있습니다. 중국 여순 감옥에 투옥돼 일제의 고문을 받는 가운데서도 신문에 연재한 글인데요. 독립 뒤, 1948년 종로서원이 ‘조선상고사’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역사학자로서 단재는 ‘국사는 곧 국혼’이라는 박은식의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 하는데요.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고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선 민족사학의 이념적 뿌리가 됩니다.

인터뷰) 윤석위 단재신채호 선생 기념 사업회 공동대표 - 조선상고사 의미

“자기가 북경 대학에 있는 자료를 봤고, 그리고 실제로 지방이나 만주 쪽 고구려 유적지를 눈으로 보고 그것이 결합되어서 논문으로, 또는 저술로 그렇게 나타나게 됐다고 보이는데요.” 

“지방에 가보니까 자기가 ‘삼국사기’에서 배웠던 역사 분석 방법과 전혀 다르단 말이에요. 그 비문을 해석해 보니까 그 이전에 기록들이 그 비문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더란 말이죠. 얘기 많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썼을 때 어떻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줄여놨는지, 단재 선생은 만주에서 보자기를 풀고 틀을 깨고 그런 일들을 하셨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죠. 단재 선생이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일을 하신 건 딱 그렇습니다. 역사상 우리 역사의 시간대를 상고사까지 늘렸고, 그리고 강토를 저 위에 만주 하얼빈이나 이런 쪽까지 넓혔고 그러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부여족이라든지 옥저, 말갈 뭐 이런 게 조선민족이라고 분류하잖아요. 고구려의 주요 민족이 부여족이죠. 부여족의 시조가 하얼빈에서부터 남하합니다. 그래서 남하하면서 말갈과 같은 여러 민족들을 통합하면서 대 국가를 만들죠. 고조선이라는 큰 국가를 만들고, 뭐 이렇게 하는 그런 기록들을 만주에 가서 확인했다. 그것을 고증하고 뭐 여러 가지 논문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저는 독립운동가 중에 폭력에 의한 무장투쟁론이라든지 이런 것과 비견해서 떨어지지 않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보는 거죠.”

단재의 사상은 일찍이 언론인 생활을 통해 싹틉니다. 1905년 26살에 성균관 박사 직을 거부하고 <황성신문> 기자가 됩니다. 황성신문은 발행인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을사늑약을 비판한 민족지였는데요. 황성신문이 폐간된 뒤,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자리를 옮깁니다. ‘독사신론’, ‘천희당시화’ 등을 발표해 일제침략과 친일파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아울러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 나라를 구한 위인전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합니다. 하지만, 합법적인 독립운동이 불가능해 지자 고국을 떠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와 만주, 북경까지 26년간 길고 긴 망명 독립투쟁을 이어갑니다. 그의 투쟁방법은 역사연구를 통한 민족의식을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약자가 강자가 되는 길에서 후기에는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하는 방법론을 담습니다.

인터뷰) 윤석위 단재신채호 선생 기념 사업회 공동대표 - 활동의 변천사 의미

“(단재 선생이) 1890년 말쯤 해서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한 10년 동안 정말 급변했습니다. 우리 조선이 왕조가 무너지고 그다음에 대한 제국이 13년간 진행돼요. 그리고 그 사이에 일본이 원조 형태라는 식으로 해서 조선의 경제권을 다 가져가잖아요. 그렇게 하는 과정이 정말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시기가 단재 선생의 정체성에 혼란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아 이거 역사를 공부해야 하겠구나.’라는 그런 의식 같은 것들,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식 같은 것들을 정립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론적으로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잖아요.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만들잖아요. 그 임시정부를 만들면서 과연 그 혼란기를 벗어나서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우리 민족을 끌고 제대로 된 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하다가 그 시기에 볼셰비키 혁명이라든지 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신해혁명이라든지 여러 혁명들이 일어나면서 ‘이것이 장기화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신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폭력혁명이라든지 뭐 이런 것들도 참 중요하지만 좀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 민족이 가는 길은 철학적으로 완성된 이상적인 국가, 그것은 아마 무정부주의 형태의 아주 고급스러운 국가형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왕이나 황제나 이런 집중 수렴되는 형태라고 본다고 그러면 지금 스웨덴이나 그런 데서 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완성된 형태’ 아마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복지 국가?) 

“그렇죠. ‘민중 중심의 복지국가’”

단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합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내부 다툼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행태를 비판하며 손을 뗍니다.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활동하다 1928년 일제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뒤에 보시는 사진은 단재가 투옥됐던 중국 여순의 일제 감옥의 방입니다. 단재는 모진 고문과 열악한 감옥생활에 8년만인 1936년 2월 21일 순국합니다.

인터뷰) 이덕남 여사 / 단재신채호 선생 며느리 - 단재의 개인적인 삶

“개인이라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뒤에 같이 동지 했던 분들 얘기 들어보면 ‘우리는 의열단이더라도 의열단만의 의열단은 아니었다. 우리는 무정부주의를 했는데’ 그 무정부주의가 내가 뭐냐고 그랬었거든요. (그러자) ‘일본은 나쁘게 해석을 한다, 무정부주의를. 그런데 우리는 자유 공동체, 그거를 이룩하고자 굉장히 노력을 했었다’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평생을 종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단재의 후손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요? 최근 며느리 이덕남씨와 손자 2명이 정부와 불교재단 선학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단재가 소유했던 옛 삼청동 집터 소유권을 되돌려 달라는 소송입니다.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빼앗아 일제 소유로 넘겼다는 게 이윱니다. 근거는 2가집니다. 먼저 토지조사부. 둘째는 현 주소지로 ‘본인 소유 땅 문서를 잃어버렸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 광곱니다.

인터뷰) 이덕남 여사 / 단재신채호 선생 며느리 - 일제 강탈후 변천과정

“이 언론들이 잘 모르니까 유품을 내놔라, 뭐 사진을 내놔라 이런 얘기 할 때 굉장히 아파요. 나는 아프다고. 어른들이 생존하고 있을 때 끼니가 간 데 없고 정말 잡수는 걸 부자 밥 먹듯이 했는데(가난하게 살았는데) 심지어는 우리 시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거의 굶겨서 영양실조가 아니라 거의 굶어서 죽었어요. 그런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셨던 분인데 거기에 또 해방도 되기 이전에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품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죠. 신채호 선생 같은 경우에는 1910년. 여기서 보고 나도 알았어요. 4월 아마 말경 가셨던 것 같아. 망명을 하셔 가지고 36년 2월 21일 한 줌의 재가 돼서 돌아오신 분이니까 망명지에서는 자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없죠.”

“호적이 없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국적이 없어서, 민적이 없어서 묘도 암장을 할 정도였으니까.”

“2009년 4월 13일에 비로소 62분의 선열을 국적을 해줘요. 이명박 정부 초기에. 그나마 그게 있으니까 지금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이 만들어진 거죠. 그래서 했습니다. 했는데 지금도 일곱 쪼가리가 났는데 두 쪼가리가 ‘선학원’이라고 하는 사찰에서 그걸 가지고 있어요. 2-1, 2-2 이렇게 두 쪼가리를 선학원에서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이쪽으로 다 정리는 돼 있지만 그것도요. 재판비도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추후에 하려고 하고 있고.”

단재 신채호 가족만이 아니죠. 독립지사는 땅을 빼앗겨 가난에 고통 받고, 친일파는 땅을 얻어 호화롭게 살고. 일그러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올바른 민족의식이나 국가관이 정립될 수 있을까요? 과거 전쟁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헌법을 바꿔 전쟁국가로 변신하려 발버둥치는 일본. 자유무역의 국제 원칙을 어겨 가며 한국에 경제도발을 감행하는 일본.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의 망령이 떠돕니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르게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던 단재의 발자취가 더욱 절실해 지는 이윱니다. 단비뉴스 임지윤입니다.

(영상취재 : 임지윤 / 편집 : 임지윤 / 앵커 : 최유진, 김현균)


편집 : 김지연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