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최유진 기자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드라마 <SKY캐슬>에서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이 학부모 한서진에게 사이비 종교 교주 같은 말을 건넨다. 솔깃해진 한서영이 이내 코디의 마법 같은 주문을 따른다. 부모와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친다. 스펙 쌓기에 혈안이 돼 매달리는 안쓰러운 이전투구가 단지 드라마 속 허구에 그칠까? 유명 강사의 수업을 들으려 밤늦도록 학원을 전전하고, 대학이나 외국을 마다하지 않고 교묘하게 찾아다니며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적을 경력을 만들어낸다. 족집게처럼 길을 일러주는 입시 코디는 인생에서 목적과 수단이 헷갈리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현자(賢者)’나 다름없다.

B.C. 334년 알렉산더도 페르시아 정복 길에 현자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키니코스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실체가 궁금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의 부유한 도시국가 코린토스의 아고라로 간 알렉산더는 통나무 속에서 기거하던 디오게네스에게 소원을 물었다. 이때 디오게네스가 ‘햇빛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모두가 권력자 알렉산더에게 아첨하거나 청탁에 매달렸지만, 디오게네스는 달랐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영화나 명예가 아닌 햇빛, 즉 자연이었다. 신영복 선생이 정재승 교수와 나눈 특별대담에도 햇빛이 나온다.

“제가 무기징역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중략) 저는 햇빛 때문에 죽지 않았어요. (중략)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죽지 않았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죠.”

▲ 아이를 시골에서 키우기 위해 ‘귀촌’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 Pixabay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조작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재심 무죄판결로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햇빛을 오래 받지 못해 생긴다는 ‘악성 흑색종’이란 불치암 선고를 받았다. 신영복은 암 판정을 받기 전 <더불어숲>이라는 책을 썼다. 그가 2002년 머물던 오대산 자락 미산계곡 산방은 훗날 ‘더불어숲 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자연 탐사 기회를 제공하지만,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쌍방향 ‘성찰’이 주를 이루는 문화학교다. ‘울창한 숲도 한 알의 씨앗에서 시작된다’는 소박한 진리 속에 자연의 위대함, 겸허해야 하는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문명의 크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문화의 '모범'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의 문화(Culture of Nature)'가 문화의 속성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에게 학군 대신 자연을 선물했지요”라는 2014년 <한겨레> 기사가 새롭게 느껴진다. 사교육이나 명문 학교를 찾아 ‘상경’하는 대신, 아이를 시골에서 키우기 위해 ‘귀촌’을 택한 부부 이야기다. 산촌 유학, 숲 유치원이 생겨난 배경도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2010년 전국 3곳의 교육 시설에 57명밖에 안 되던 농∙산∙어촌 유학생 규모는 지난해 18곳 260명으로 4배 이상이 됐다.

하지만, 이런 자연 친화적 생각은 우리 사회 주류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을 넘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딛고 목표를 이루는 요즘 자연까지 바라볼 여유가 없어 보인다. ‘열린 마음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해질 수 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이기심 가득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마음을 열고 향해야 하는 곳은 디오게네스나 신영복이 찬미했던 햇빛 가득한 자연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 대한민국 사회 논란의 중심에 선 조국 교수에게 묻고 싶다. 교수님은 아이에게 무엇을 선물했어요.”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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