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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말, 권력자의 말

기사승인 2019.08.16  15: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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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사전] ‘말의 맥락’

   
▲ 박지영 기자

“네 맘대로 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마음’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심각한 갈등 상황에서 ‘네 맘대로 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면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손놓겠다’는 포기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대화가 중단되거나 다툼이 커지기도 한다. 반면 분위기가 좋은 상황에서 나온 “내 마음 알지”라는 말은 연인 사이의 이심전심을 요구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투영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고민하면서 상대방 감정을 헤아린다. 이때 ‘마음’은 때론 답답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동력을 불어넣는 촉매 구실을 한다.

   
▲ 부당한 재판 개입과 판사 사찰 등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 KBS 뉴스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관계의 활력을 불어넣는 이 ‘마음’을 직장 상사나 자기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의 입에서 듣게 된다면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수직 관계에 있는 상사가 “내 마음 알지”, “네 마음대로 해 봐”라고 했을 때 우리들 머리 속은 복잡해진다. ‘뭘 원하는 거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말하지 않아도 상사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현재 내 업무 능력과 직결된다고 여긴다.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나 압력은 대개 의도를 숨긴 채 수많은 ‘을’을 억압한다. ‘혹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힘 없는 ‘을’은 노심초사하면서 권력자의 마음을 파악하기 바쁘다. 실체 없는 권력자의 ‘마음’은 왜곡된 권력관계와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더욱 굳힐 뿐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은 권력자의 말은 업무와 상관없는 부당한 지시를 은근슬쩍 내리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이후 문제가 되면 ‘그렇게 말한 적 없다’며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방패로 삼는다. ‘자신은 지시한 적 없고 다른 이가 알아서 한 것’이라는 변명이다. 사법 농단 사건에서 이런 권력자들의 책임 회피를 목격한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일선 판사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거나 “공무원은 직무상 명령이 명백하게 위법한 경우 복종 의무가 없다”며 자신에게 적용된 직권남용죄 혐의를 부인했다. 일선 판사들에게 미쳤을 자신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책임을 외면한 것이다. 사법 농단 같은 굵직한 사회 현안이 아니더라도 무책임한 갑들의 모습은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실체 없는 ‘마음’을 내세워 흔적없이 부당함을 강요하는 갑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각종 권력형 비리의 위법성은 흔히 ‘권력 개입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권력자로부터 부당한 지시나 압력을 받았을 때 ‘을’이 겪게 될 상황과 피해를 보다 폭넓고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넌지시 던지는 권력자들의 ‘말 한마디’에 보다 무겁고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 내 민주주의, 수평적 관계가 자리잡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은 강력하다. 힘 있는 자들이 자기 책임을 분명히 하지 않고 실체 없는 ‘마음’을 앞세워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현실을 개선하려면 ‘직권남용’을 ‘을’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홍석희 기자

박지영 기자 bing831@naver.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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