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⑯ 독립운동가 오광심

“광복군으로 오라” 선전의 귀재 오광심

<앵커>

목숨 거는 독립투쟁.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과 가혹한 감옥생활을 견뎌내기란 때로 인간의 한계를 넘기도 하죠. 이 모든 고난을 각오하고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는데요. ‘선생님’으로 불리며 광복군 모집에 큰 공을 세웠던 오광심 여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여성 독립지사 오광심 선생의 일대기를 김현균 기자가 조명했습니다.

<리포트>

최근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이몽’.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상을 부각시켜 주목을 받았습니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등장인물 소개 자막, ‘엔딩 크레딧’을 기억하는지요? 21명의 독립운동가와 1개의 독립운동단체가 자막에 올랐는데요. 그 중 한분이 임시정부 광복군 선전의 귀재, 여성독립투사 오광심 선생입니다.

경기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 <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 특별전이 펼쳐집니다. 내부 전시실에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사진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오광심 선생이 눈에 띕니다. 조선혁명당과 민족혁명당, 나아가 애국부인회와 한국광복군까지. 중국 각지를 오가며 펼친 험난한 투쟁의 일생이 탐방객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오광심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납니다. 어려서 남만주로 이주한 뒤, 민족교육을 독립투쟁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스무살 되던 1929년 교편을 잡아, 배달학교와 동명학교에서 가르칩니다. 모두 독립운동단체들이 세운 학굡니다.

인터뷰)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오광심 선생님께서 배달학교에 가게 된 배경은 '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당신이 선생을 했으면 좋겠다.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으니까 당신이 아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심어줬으면 좋겠다.' 이런 제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강화하자 교단에서 내려옵니다. 독립운동의 터전을 잃는 가운데 좀 더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섭니다. 조선혁명군에 참여해 분필 잡던 손으로 총을 잡습니다. 만주에서 임시정부로 도움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전달한 활약은 유명한 일홥니다.

인터뷰) 김일진 오광심 선생 후손

"국내로 돌아오셔서도 성경책을 마태복음을 읽었다면 그 책을 다 외우실 수 있으셨어요. 그 정도로 외우시는 걸 제가 봤고요. 외우는 거에 있어서는 어머니 오광심 선생께서 일가견이 있으셨기 때문에 한 3일인가를 보고서를 외우셨죠. 가면서도 자료 없이 몇 번이고 다시 외우셨죠."

한국광복군으로 소속을 옮긴 오광심 선생은 선전활동에 나섭니다. 광복군 기관지 <광복>을 통해 무엇보다 여성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합니다.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오.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오광심, 광복군 기관지 <광복>에서

인터뷰)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광복군 제3지대원으로 부양에서 계실 때 부양 분들이 말씀하시길 '남편인 김학규 장군도 있지만 두 부부가 마음을 모아서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투쟁하시는 걸 보고 두 부부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광복군 제3지대 대원으로 선생은 신병 모집을 맡았습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학도병들을 중국 방송을 통해 회유하는 공작입니다. 선생은 3년 동안 160여명의 광복군을 신병으로 모으는 공을 세웁니다. 같은 기간 광복군이 모집한 전체 신병의 반이나 됩니다. 신병들을 가르치며 잘 보살핀 덕에 ‘선생님’으로 불렸습니다.

인터뷰)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다른 여성 광복군인 지복영 선생님 같은 분들이 3~4살 언니뻘인 오광심 선생님의 이름을 함부로 못불렀다고 합니다. 보통 선생님이라고 하면 오광심 선생님이었고, 이름을 부르더라도 오광심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선생은 남편인 독립지사 김학규 선생과 함께 중국에 남습니다.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를 설치해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귀국을 돕습니다. 1946년에는 만주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운동까지 펼칩니다. 하지만, 중국 내전으로 공산당이 심양을 함락시키기 직전 1948년 4월 환국합니다.

인터뷰) 김일진 오광심 선생 후손

"중국 공산당이 계속 내려오니까 어머님이 홍콩에서 거류민단증을 받아가지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새로운 고난이 시작됩니다. 친일파가 득세하고 독립지사는 오히려 탄압 속에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생은 조국 독립이 아닌 가난과 싸우다 1976년 67살의 나이로 작고합니다.

인터뷰)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경제상황이 어려웠다는 거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돈을 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오광심 선생이) '동지들이 돈을 준다', '동지들이 먹여살린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1만5511명 중 432명. 무슨 수치일까요? 전체 독립유공 포상자 가운데 여성 유공자 비율로 고작 3%에 그칩니다. 이것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여성유공자 75명을 새로 추가한 덕분입니다.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 독립지사들. 오광심 선생도 작고한지 3년이 지나서야 건국훈장을 지각으로 받았습니다.

인터뷰)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실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를 보면, 비밀문서 전달하고, 전단지 뿌려주고, 총도 몰래 운반해주고, 아이 안은 것처럼 꾸며서. 이런게 독립운동 활동 아닌가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런 활동들을 그동안 인정을 안해준 것이죠."

최근 일본이 반도체 관련 일부 첨단소재의 한국 수출 금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도발입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던 일본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반성 없이 제국주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 일본. 우리가 가려진 독립투쟁사를 모두 밝혀 교훈으로 바로 알려야 하는 이윱니다.

단비뉴스 김현균입니다.


편집 : 유연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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