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㊼ 금관

고대 이집트 달력이 현대 달력의 기원

그리스 미케네에서 이집트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19년 전 2000년 처음 찾았던 이집트는 요즘과 사뭇 달랐다. 한국 국적기의 카이로 직항편이 있을 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던 역사 관광지였다. 배낭여행객은 물론 단체관광객도 많았다. 한국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유명 역사관광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홍해의 해변 휴앙지는 바다 수영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에서 이집트로 다른 나라 항공기를 타고 돌아간다. 관광하기 좋은 날씨의 겨울철에 지난해부터 잠시 전세기를 띄울 뿐이다. 서양인들 발길도 뜸해졌다. IS테러 이후 중동 지역 정세가 전보다 위험해진 탓이다. 이집트는 인류 역사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유적과 유물로 가득하다. 현대 문명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달력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태양력은 이집트인들이 5000년 전부터 사용하던 것을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B.C 46년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배워 쓰기 시작한 달력을 율리우스력이라 부른다. 지금도 그리스 정교에서 사용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2년에 율리우스력의 오차 10일을 당겨(1582년 10월 4일 뒤 10월 15일로 당겨, 5일부터 14일까지 10일을 없앤) 그레고리력이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이다.

▲ 이집트 기자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 김문환

이집트를 찾으면 누구든지 기자의 피라미드나 다흐슈르의 피라미드 앞에서 입을 벌리고 만다. 높이 145m 가까운 거대한 석조건축의 제작연대는 B.C 27세기-B.C 26세기. 단군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됐다. 문자도 마찬가지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알파벳으로도 활용됐다. 전용 알파벳이 아니어서 그렇지 알파벳의 발명자는 페니키아인에 앞서 사실 이집트인들이다. 인류 문명의 시원을 들여다보기 좋은 이집트 관광이 해외여행 보험가입도 안될 만큼 안전문제로 위축되는 현실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배우며 그 속에서 미래를 열어갈 영감을 얻을 기회를 잃는다는 의미다. 속히 지구촌이 안정을 되찾아 예전처럼 자유롭게 이집트 탐방으로 머리와 가슴을 넉넉하게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누브(금)’가 나는 지방 ‘누비아’ 흑인지역

이집트 남부 아스완으로 가보자. 나일강 홍수에서 이집트인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아스완댐으로 이름 높다.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은 물론 필레 신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아스완은 익숙하다. 이 지역은 고대 흑인들이 거주하는 누비아(Nubia)라고 불렀다. 고대 이집트어로 누브(Nub)는 금을 가리킨다. 이집트 문명은 금을 숭상하고 많은 금제품을 만들었다. 금, 즉 ‘누브(Nub)가 많이 나는 지방이라고 해서 누비아(Nubia)라는 이름을 붙인 거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이집트 남부 아스완 지방, 그리고 남쪽 나일강 상류로 더 올라간 람세스 2세 신전의 아부심벨, 국경을 넘어 수단을 포함한다. 수단에서도 하르툼(Khartum)까지다. 하르툼은 우리로 치면 양수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 하르툼은 이디오피아 고원지대 타나 호수에서 발원하는 청나일과 케냐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되는 백나일이 만나 본격적으로 나일강 물줄기를 이룬다.

▲ 나세르호와 아스완 필레 신전. ⓒ 김문환
▲ 아부심벨 대신전. 람세스 2세 신전. ⓒ 김문환

누비아 지역은 더워서 살기 힘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아스완은 7,8월중 낮에 43도에서 45도까지 올라간다. 구름 한 점 없이 강렬한 태양빛이 내리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머리에서 땀이 난다. 한 낯 땡볕에 서 있으면 큰 일 치른다. 저녁 무렵이면 낮 동안 뜨거워진 대지가 발산하는 복사열로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나일강이 상황을 바꿔준다. 나일강물은 7,8월에도 서늘하다. 수온이 낮아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45도에도 그늘진 강물에 들어가 있으면 한기를 느낄 정도다. 겨울에는 더없이 온화하고 살기 좋다. 영국의 세계적인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아스완의 유서 깊은 올드 카타락트 호텔에 머물며 <나일 살인사건(Death on the Nile)>을 써 1937년 출간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78년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히트했고, 현재 다시 제작중이어서 2020년 중 팬들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B.C 8세기 흑인 쿠쉬 왕조 이집트 지배

아스완 나일강변에 자리한 누비아 박물관으로 가 유물을 보며 잠시 누비아 흑인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고대 이집트 파라오는 금을 찾아 누비아 원정을 자주 떠났다. B.C 25세기 이전부터 누비아 지방에서 전리품을 챙겼다. 신왕국 18왕조 투트모스 3세는 나일강 상류에 나파타를 건설했고, 19왕조 람세스 2세는 아스완 남쪽에 아부심벨을 만들었다. 하지만, B.C 10세기 이후 누비아 흑인들은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고, 이집트 3중간기 21왕조 때 혼란을 틈 타 쿠쉬 왕조를 세웠다. B.C 750년 경 쿠쉬 왕조의 지방 호족 가운데 제벨 바르카에 거점을 두고 있던 카흐타는 상이집트 즉 오늘날 룩소르 지방을 공격해 지배한다. 흑인들은 이집트 아몬신앙을 받아들이고, 파라오 호칭은 물론 이집트 문자를 활용하며 문화의 격을 높인다. 마치 중국 주변 민족들이 중국 율령제도는 물론 한자를 받아들여 세련된 형태의 통치시스템과 문화를 가꿔 나간 것과 같다.

▲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 김문환
▲ 흑인 병사들 조각.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 김문환

카흐타의 아들 피안키는 B.C 747년 아버지가 정복하지 못한 나머지 이집트 전역을 손에 넣는다. 자칫 흑인의 역사를 피지배의 역사로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집트를 틀어쥐고 파라오가 된 피안키(재위 B.C 747년-B.C 716년)는 이집트 25왕조(B.C 747년-B.C 664년)를 연다. 그의 동생 샤바카(재위 B.C 716년-B.C 702년)가 파라오로 있을 때 흑인왕조는 절정의 위세를 떨친다. 비록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침략해온 신 앗시리아 제국에 밀려 다시 누비아 지방으로 쫓겨났지만, 이후에도 누비아 흑인들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도 끝없이 이집트로 침략해 왔다. 동시에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이후 그리스문화는 물론 로마, 훗날 기독교 문화, 동로마(비잔틴 제국)문화를 받아들인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4-6세기 누비아 지방에서 꽃핀 은제 보석관이다.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4-6세기 흑인왕조 은제 보석관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을 수놓는 3점의 은제 보석관을 보자. 은관이어서 오랜 세월 지나 빛이 바랜 탓에 일견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홍옥수(카닐리언)로 장식한 면모가 단순한 은관의 차원을 넘는다. 3점 모두 대륜이 넓고, 표면에 홍옥수 장식을 붙였다. 손바닥 형태의 세움 장식 중 하나는 숫양의 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에 뿔을 달았다. 다시 그 위로 파피루스 줄기를 얹은 모습도 보인다. 코브라를 단순화해 대륜 주변에 빙 둘러 세웠다. 코브라는 머리에 태양원반을 썼다. 숫양이나 태양원반 모두 태양신 아몬을 상징한다. 호루스의 눈(우자트)을 조각해 대륜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 은제 보석관은 언제 누가 만든 것일까?

▲ 흑인 은제 보석관1. 4-6세기.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 김문환
▲ 흑인 은제 보석관2. 4-6세기.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 김문환

아스완 남부 발라나(Ballana) 지역에서 발굴된 은제 보석관들은 350년-600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시기 조성된 거대한 봉분 형태 무덤 122기를 1928녀부터 1931년 사이 발굴해 얻은 성과다. 주인공은 지역의 토착 지배세력가나 부인이다. 일종의 왕이나 왕비다. 이집트 전통신앙은 물론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박물관 측은 설명한다. 은제관이 출토된 한 무덤에서는 남성 지배자의 유골 근처에 순장된 젊은 여인 유골도 나왔다. 5세기, 은제 관 출토, 젊은 여인 1명 순장. 어디서 익숙하게 들던 내용이다. 경주 황남대총의 남분 얘기다. 같은 제작시기, 은제 관에 여인 순장까지. 공통점이 특기할 만하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2500년 세월 다양한 금관

이제 장소를 이집트 수도 카이로로 옮겨 보자. 중세를 벗어나 근세 초반으로 들어서는 14세기 『무깟디마(Muqaddimah, 역사서설)』를 쓴 이슬람권 지성 이븐 할둔. 아랍인의 이슬람 문명이 단시간 내 성공한 비결을 근면, 검소, 단결, 용기로 가득 찬 신바람 기풍 ‘아싸비야(Asabya)’라고 정의한 할둔이 1378년 이집트에 와서 한마디 남긴다. “성과 궁전, 학교로 가득 찬 세계의 정원, 어머니”. 700여 년 전 이집트 카이로이 모습이다. 중세 이슬람군대 주둔도시로 처음 닻을 올린 카이로는 12세기 살라딘의 파티마 왕조 때 이슬람 세계 전체를 대변하는 도시로 성장한다. 기독교와의 전쟁에 황폐화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몽골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서아시아와 달리 비록 흑사병에 시달렸지만, 13-14세기 정세안정을 구가하며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900만 명의 인구가 북적이며 뿜어내는 문명 뒤꼍의 숨 막히는 모습, 쓰레기와 먼지가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이 아니었다.

▲ 흑인 은제 보석관 3점. 4-6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흑인 은제 보석관1. 4-6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흑인 은제 보석관2. 4-6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을 찾으면 두 번 놀란다. 먼저 인류 역사의 찬란한 금자탑, 그 자체에서 받는 압도적인 위용이다. 프랑스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1858년 이집트 정부의 허락 아래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막기 위해 만든 이집트 박물관은 1902년 오늘날 타흐리르 광장에 자리 잡는다. B.C 3000년대부터 인류사를 수놓는 찬란한 유물이 탐방객을 맞는다. 두 번째 놀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유물들이 마치 방치되다시피 전시되고 있는 점이다. 다른 나라 박물관에 가면 귀한 대접 받을 수천 년 된 유물들이 먼지 뒤집어 쓴 채 구석에 쌓였다. 2020년 기자 피라미드 지구에 새 박물관을 완공한다지만 답보상태에 빠진 경제 여건상 제대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금관과 관련해 색다른 탐방의 묘미를 안긴다. 유라시아 대륙 주요 박물관을 두루 탐방했지만, 무려 25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다양한 형태의 금관을 소장한 곳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이 유일하다. 먼저 1층 전시실에서 만나는 은제 보석관 3점은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에서 보던 4-6세기 은제 보석관처럼 아스완 남부 발라나에서 출토됐다. 대륜 위 세움 장식은 아몬을 상징하는 양머리 조각을 선보인다.

헬레니즘 시대 B.C4-B.C3세기 이집트 금관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흑인왕조 은제 보석관을 보고 2층 전시실로 금관 탐방을 이어가자. 황금유물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보물관으로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구촌 어느 문명권에서도 볼 수 없는 막대한 분량의 빼어난 황금 유물과 세공기술 때문이다. 다른 황금 유물을 제외하고 금관만 살펴보자. 이집트는 B.C 331년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더에게 정복된 뒤 그리스 문명권으로 들어간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명권 국가들 가운데서도 유독 금관을 애용한 나라다. 그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더의 부하장군이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에 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헬레니즘 시기(B.C 331년-B.C 31년)의 중심지였다.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이자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 금관. 헬레니즘 시대 널리 유행한 이집트 의술의 신 세라피스를 소재로 그리스 신전과 포도잎 등의 그리스 문명 요소를 가미했다. B.C 4-B.C 2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이집트의 헬레니즘 금관은 특이한 형식을 지녔다. 보통 마케도니아 풍 헬레니즘 금관은 대륜을 만들지 않고 가느다란 철사 형 고리 위에 참나무 잎이나 월계수, 올리브 잎, 담쟁이덩굴, 도금양 잎을 풍성하게 붙이는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이집트 헬레니즘 금관은 제법 넓은 대륜에 포도 잎, 덩굴손 같은 식물을 붙였다. 앞부분은 그리스 신전 형태 틀에 헬레니즘 시기 이집트에서 숭배된 의술의 신 세라피스를 조각했다. 세라피스의 오른손에는 역시 그리스인들의 이집트 지배시기 등장한 하포크라테스 두상이 놓였다. 신을 금관에 새겨 넣는 헬레니즘 기법을 그대로 따랐다.

신왕국 시대 B.C 16세기-B.C 11세기 금관

헬레니즘 금관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금관과 마주친다. 호루스를 상징하는 매가 등장한다. 매의 몸통은 나무, 얼굴은 금이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B.C 2040년-B.C 1782년) 만들어진 호루스 머리를 보자. 큼직한 금관을 썼다. 대륜은 아무런 장식 없는 금판으로 만들었다. 대륜 앞부분에 고귀함과 권위를 상징하는 코브라 형상의 우라에우스를 붙였다. 세움 장식으로는 밀 이삭 2개를 높이 세운 슈티다. 태양신 아몬이 쓰는 관이다. 몸통과 달리 금관은 신왕국 시대(B.C 1570년 -B.C 1069년) 만든 것이라고 박물관 측은 설명한다. 신왕국은 31개 왕조가 명멸한 이집트 역사에서 18, 19, 20왕조가 지배한 시기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로 불린다. 18왕조 투탕카몬, 19왕조 람세스 2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시기 파라오다. 지상을 호령하는 신 호루스를 대신해 지상을 실제 통치하는 파라오의 금관은 없을까?

▲ 신왕국 시기 금관. 매 형상의 신 호루스 머리에 코브라 형상 우라에우스와 아몬신의 관 슈티를 소재로 한 금관을 씌웠다. B.C 16-B.C 11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투탕카몬 금관 B.C14세기 코브라 장식

1922년 11월 4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왕가의 계곡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무덤을 찾아낸다. 저승 수호신 아누비스가 개의 모습으로 9명의 포로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파라오 무덤임을 확신한 카터는 5년째 발굴 자금을 대고 있던 영국의 죠지 허버트 경에게 전보를 친다. “마침내 계곡에서 장엄한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도착을 축하드립니다.” 당시 고고학계의 주류 의견은 이제 더 이상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파라오 무덤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뒤엎고 새로운 파라오 추정 무덤을 발견했다니... 허버트 경은 즉시 배를 잡아탔고, 1922년 11월 23일 룩소르 역에 도착했다. 허버트 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24일 작업을 재개한 카터가 탐침봉으로 무덤 석실을 뚫고 3300년 만에 내부를 들여다봤다. 온갖 보물로 가득한 무덤의 주인공은 투탕카몬(재위 B.C 1334년-B.C 1325년). 이집트 고대 역사에서 유일하게 도굴이 아닌 발굴된 파라오 무덤이다.

▲ 투탕카몬 조각. 투탕카몬의 장기를 보관하던 장기보관함 4개의 뚜껑을 장식하는 알라바스터 조각. B.C 14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투탕카몬 금관. 코브라를 소재로 한 이집트 양식의 금관이다. B.C 14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이집트 박물관 2층 전시실을 가득 메운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숱한 황금유물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금관을 보자. 대륜에 홍옥수(카닐리언)로 만든 둥근 태양원반(태양신 라 상징)을 촘촘히 박았다. 대륜 앞부분에는 2개의 장식물을 붙였다. 청금석(라피스 라줄리)을 활용한 코브라 장식 즉, 우라에우스와 금으로 만든 독수리 머리다. 대륜 밑으로는 코브라 형상의 금조형물 2개를 달았다. 태양원반, 코브라, 독수리라는 이집트 특유의 모티프가 앞선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영향을 받은 금관과 차별화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네메스 관이라고 하는 천으로 만든 관을 썼다. 평소 금관을 쓰지 않는다. 투탕카몬 황금관이 더욱 새로운 이유다. 다른 파라오 무덤은 투탕카몬 것만 제외하고 100% 도굴됐다. 털린 금 유물은 녹여 매매됐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한 파라오 금 유물은 일부 소품을 제외하면 거의 남지 않았다. 투탕카몬은 우리나이 9살에 즉위해 18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소년 파라오의 무덤이 황금 부장품으로 가득했다면 위세를 누린 파라오들의 무덤은 얼마나 화려한 유물이 많았을지 짐작가능하다. 투탕카몬에 앞서 황금관을 유물로 남긴 고대 이집트인은 없을까?

주인공이 밝혀진 가장 오래된 B.C 20세기 금관

투탕카몬 보물관에서 나와 다시 일반 보물실로 가면 그 주인공을 만난다. 금관의 형태는 투탕카몬 것과 비슷하면서도 단순하다. 얇은 금판으로 만든 대륜에는 장미꽃 무늬 장식을 빙 둘러 붙였다. 앞에는 코브라(우라에우스)를 붙였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얇은 금판 2개를 묶어 대륜 위로 세움 장식처럼 올렸다. 이런 장식을 대륜 아래로는 2개 늘어트렸다. 투탕카몬 금관은 아래로 늘어트린 장식이 코브라 형상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금판이다. 청금석을 활용한 우라에우스는 화려한 면모를 뽐낸다. 파라오나 이에 준하는 왕실 일원만 활용하던 우라에우스를 장식으로 단 금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중왕국 12왕조(B.C 1991년-B.C 1782년)시기 공주 사트 하토르 이우넷으로 밝혀졌다. 여성의 금관이다. 남성 파라오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신분의 여성도 금관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 사트 하토르 이우넷 공주의 금관. 청금석을 활용해 만든 코브라 형상, 즉 우라에우스가 공주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낸다. B.C 20세기-B.C 18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사트 하토르 이우넷 공주의 금관. 청금석을 활용해 만든 코브라 형상, 즉 우라에우스가 공주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낸다. B.C 20세기-B.C 18세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공주의 금관 옆으로 2점의 금관이 더 기다린다. 투탕카몬이나 사트 하토르 이우넷 공주 금관과 형태가 다르다. 먼저, 홍옥수와 터키석 장식을 연결시킨 특이한 형태의 대륜 금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륜에는 나무를 세움 장식으로 세웠다. 가지 달린 나무를 세움 장식으로 쓴 점은 일견 신라 금관과 비슷하다. 두 번째 금관의 대륜은 장미와 백합 모양의 꽃무늬에 독수리가 나는 형상을 이어 붙였다. 섬세한 세공술이 돋보인다. 여기에 홍옥수와 터키석을 소재로 한 연꽃무늬 형태의 조각을 붙여 화려함을 더했다. 이 두 개 금관의 주인공은 12왕조 귀족 크누미트다. 크누미트 금관은 B.C19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이집트 박물관 측은 설명한다. 사트 하토르 이우넷 공주와 귀족 크누미트 금관은 지금까지 발굴된 인류사 금관 가운데 주인공이 확실하게 밝혀진 가장 오래된 금관이다. B.C 20세기이니 무려 4000년이나 지났다. 4000년 전 금관의 주인공까지 밝혀진 이집트 금관의 역사가 지구촌 금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잣대를 제공해 준다.

▲ 크누미트 금관1. 금으로 만든 백합과 장미 무늬에 독수리가 나는 조각이 돋보인다. 홍옥수와 터키석으로 연꽃 장식도 달았다. B.C 1900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 크누미트 금관2. 홍옥수와 터키석으로 만든 대륜에 금으로 만든 나뭇가지 형상 세움 장식을 붙였다. B.C 1900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 김문환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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