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④ 앤트러사이트 합정

한국 최초 화력발전소인 서울화력발전소 근처에는 폐공장이 있다. 폐공장 안에서는 큰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브라질의 유명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빙과 음악가 조앙 질베르트가 발전시킨 ‘신경향 음악’ 보사노바 재즈곡이다. 음악 소리에 빨려들 듯 안으로 들어서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이 귀를 때리고 진한 커피 향이 코를 스친다.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두운 카페다. 카페에서 내놓은 커피는 ‘윌리엄 블레이크’, ‘나쓰메 소세키’ 등으로 이름이 붙어있다.

▲ 서울 마포구 합정동 357-6 ‘앤트러사이트 합정’ 겉모습. 신발공장이던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 카페와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 임세웅

“‘나쓰메 소세키’와 ‘윌리엄 블레이크’를 드립니다”

“여름비가 사정없이 퍼붓는 날, 한 청초한 여인이 백합을 들고 다이스케의 집으로 들어선다. ‘향기가 참 좋지요’라며. 그녀는 가까이서 꽃향기를 들이마신다.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다이스케는 꽃을 받아 수반에 꽃는다……” - 나스메 소세키 <그 후>

‘가장 단순한 문장은 가장 견고한 이야기를 구축해 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등을 쓴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은 이미지를 다채롭게 만들지만 분명한 문장들만 사용하여 명확한 묘사를 만들어 냅니다. 단순한 언어 결합으로 이어진 것. 거름망을 거치고 확실한 재료로 완성된 문장입니다......중남미의 좋은 질감, 아프리카의 특별한 향미와 함께 부드럽고 화사함을 느낄 수 있는 커피이며, 좋은 균형감과 부드러운 향미의 매력으로 앤트러사이트의 가장 유명한 브랜드입니다.’

카운터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커피 브랜드에 관한 설명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영국 시인 겸 화가)가 누구인지, 커피 이름이 왜 윌리엄 블레이크인지, 커피 브랜드가 왜 ‘나쓰메 소세키’인지 설명한다. 글을 다 읽고 카운터를 보면, 카운터로 기능하는 컨베이어 벨트가 눈에 띈다. 이곳은 공장인가, 카페인가? 커피라는 오브제에 의미를 입힌 인문 예술 전시장인가?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앤트러사이트 합정’이다.

▲ 2층 공간은 낮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외부의 빛으로 내부를 환하게 밝힌다. 자연광이 충분하지 않은 저녁에는 전구로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해 카페를 밝힌다. ©️ 임세웅

빠찡코 기계, 신발공장 정체성을 계승한 카페

‘앤트러사이트 합정’의 공간은 공장의 정체성을 계승한다. 1층 카운터로 쓰이는 컨베이어벨트는 이를 상징하는 소품이다. 2층에 올라서면 탁 트인 공간에 테이블을 널찍널찍하게 배치해 둔 공간이 펼쳐진다. 테이블은 전체 프레임이 검은색 철제로 이루어져 있고 선반만 목재라 투박한 느낌을 준다. 벽마다 큰 창문이 있지만, 공간이 넓어 자연광이 모든 내부를 환하게 밝히기에는 부족하다. 내부는 노란색 조명이어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 공간이 넓고 소리도 울리지만 마주 앉은 사람과 이야기하며 집중하기에 좋은 분위기다. 내부는 공장으로 사용하던 벽면과 천정을 그대로 사용한다.

▲ 1층 카운터의 컨베이어 벨트가 건물의 역사를 알려준다. ©️ 임세웅

‘앤트러사이트 합정’은 공간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공장의 역사를 계승한다. 이 공장에서 가장 먼저 생산한 제품은 빠징코 기계였다. 이후에는 전기 부품을 생산했다. 더 이후에는 신발을 만들었다. 지금은 커피를 만든다. ‘당인리 커피공장’이라는 ‘앤트러사이트 합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커피공장의 ‘생산품’은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곳 커피의 재료는 코스타리카 누에바 메사, 에콰도르 라파파야, 과테말라 와이칸 등을 포함한 11가지 커피 원두다. 블랜드 원두 말고는 모든 커피 원두가 매진 상태였다.

▲ 매진된 커피 원두. ©️ 앤트러사이트 인터넷 샵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땐 루프탑으로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을 보면 커다란 철제문이 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루프탑이 나온다. 루프탑은 공장 안과 분리된 공간으로, 내부 음악 소리가 완전히 차단돼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다. 안쪽이 빛으로 따뜻함을 표현했다면, 루프탑은 자연광 그대로 내리비치는 정원 풍이다. 조용한 주택가 끝자락, 차들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길이라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 정원 분위기인 2층 루프탑. ©️ 임세웅

카페 계단과 홀 군데군데 그림 전시

2층에서 1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다 고개를 들어 보면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6월의 그림으로 마크 로스코의 <No.12>가 걸려 있다. 전시된 그림은 매월 첫 주 점심시간에 교체된다. 글로벌 아트 뮤지엄 편집숍 ‘비롯(BIROT)’이 이 공간을 빌어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림 작품은 계단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2층 벽면에도 그림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전시돼 있다. 조용하게 작품만 감상하는 여느 전시회장 못지않게 다소 어둡지만 따뜻한 조명, 공간에서 울리는 사람들 이야기 소리와 잘 어울린다.

▲ 마크 로스코의 가 앤트러사이트 합정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위에 전시돼 있다. ©️ 임세웅
▲ 2층은 전시관처럼 건물 벽을 활용한 모습이 눈에 띈다. ©️ 임세웅

카페인가 문학관인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카운터 맞은편 브랜드 설명을 읽어 보면 커피를 파는 카페인지 문학관인지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원죄에서 분리된 신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위한 문장을 거듭했으며, 인간 내면의 신성성을 깨우길 원했습니다.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처럼 로스팅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해 에센스의 커피를 만들고자 탄생했습니다.’

앤트러사이트에서 파는 커피 원두 '윌리엄 블레이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영국의 시인 겸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표현한 여러 작품의 특성에 착안해 커피 원두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다. 다른 커피 원두들도 마찬가지다. ‘나쓰메 소세키’는 멋 부리지 않는 단순한 문장으로 선명한 이미지를 묘사하는 그의 문체에 착안해 만들어진 원두다. 단순하고 올바른 기법으로 부드럽고 화사함을 느낄 수 있는 앤트러사이트의 가장 유명한 블랜드라고 앤트러사이트는 설명한다.

비슷한 이유로 사람의 이름을 가져다 쓴 원두 ‘파블로 네루다’ 말고도, 생산한 블랜드 원두에 헤르멘 헤세를 인용해 ‘히스토리 미스터리’, 토마스 만을 인용한 ‘버터 팻 트리오’,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을 인용한 ‘공기와 꿈’ 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원두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따라가면 자연히 카운터 맞은편 벽에 있는 원두 설명을 보게 된다.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커피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층 카운터 맞은편에 있는 커피 판매대는, 이를 깨닫는 순간 커피를 오브제로 한 예술품이 펼쳐진 전시장이 된다.

▲ 1층 커피판매대에는 커피 원두에 관한 설명을 미술작품 설명처럼 써 놨다. ©️ 임세웅

지역 커뮤니티 공간 구실도

출구 바로 옆에는 벽에 붙은 전단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네에서 열리는 ‘마르쉐 채소시장@합정’ 홍보 전단지다. 이 시장은 돈과 물건만 교환하는 시장 대신 사람, 관계, 대화를 하는 시장을 지향한다. 지향점대로 생산자, 소비자, 자원활동가, 시민들이 모여서 연다. 농부들과 천천히 깊게 대화하며 장보고 밥 짓는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고자 동네에서 열린다.

▲ ‘마르쉐 채소시장’ 홍보지. ©️ 임세웅

‘앤트러사이트 합정’을 뭐라고 딱 잘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여기는 폐공장이었고 공장이며, 카페이자 미술 전시관임과 동시에 동네 커뮤니티의 장이다. ‘앤트러사이트 합정’이야말로 공간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필요에 따라 공간의 속성을 바꾸는 ‘카멜레존’이다.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김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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