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한일관계'

▲ 박동주 기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냉랭한 한일관계를 풀려고 하는 모양인데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만의 정의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그 학교에는 유독 일본인 학생이 많았다. 수많은 나라 다양한 친구들 속에서, 한국과 일본 학생들은 빠르게 친해졌다. 금세 밥도 같이 먹고 놀러도 많이 다녔다. 비슷한 문화에 익숙해서 그런지, 반대로 서로를 향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번은 수업에서 국가간 관계가 다뤄졌다. 선생님은 “한국과 일본 관계는 어떠냐”며 웃으며 물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일본인 룸메이트 유키를 포함한 일본 친구들과 눈빛이 마주쳤다. 서로 마른 웃음만 지었다. 중국어 공부나 계속하자는 선생님의 정적을 깨는 소리에, 10초쯤의 숨막힘은 지나갔다.

영겁이 지난 것 같은 이 10초로, 우리 대화 주제는 역사를 통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친구들과 하는 문화수업에서, 한국과 일본은 가능하면 같은 조가 안 되려고 애썼다. 핀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등 한국과 크게 얽힌 적이 없는 나라 친구들이 편했다. 유키와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불편해졌다. 그냥 한번 얘기해볼까?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일본에서는 한반도 강점기를 단 몇 줄 배우고 넘어간다는데, 사실일까? 유키는 배려심도 깊고 감정적이지 않아 괜찮을 거 같은데. 어느새 기숙사 앞이다. 잘 때까지도 한일 간 과거사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좋은 관계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다. 과거 한일 양국 간에 존재했던 수많은 갈등·전쟁·고통의 이야기를 우리 사이에 꺼내기가 무서웠다.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상조차 안 되는 아득함이 주는 느낌에 가슴이 답답했다.

평화는 일시적 전쟁 중지가 아니라 모든 적대 행위의 종식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거하지 못하고, 미래에 전쟁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내용을 암중에 유보한 채 맺은 조약은 결코 평화조약으로 여길 수 없다. 모든 적대 관계 종식을 뜻하는 평화가 아닌, 휴전이나 전쟁의 연기에 불과한 것이니까. 1973년, 긴 전쟁에 지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둘러 남북베트남과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월남은 월맹에 패망하며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출범했다. 

▲ 진정한 평화는 잠깐의 전쟁 중지가 아닌, 모든 적대 행위의 종결을 의미한다. ⓒ pixabay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보면 인류 역사에서 평화조약이 약 8천건 체결됐으나 그 효력은 2년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평화협정은 종교인이 지켜야만 하는 교리가 아니다. 평화 상태는 확고한 기반을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단순 적대 행위 중단은 평화 상태의 보증이 아니다. 이 보증이 이웃 간의 진실한 대화를 통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전부 녹여내 이뤄지지 않는다면, 서로 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북미관계보다 더 오랜 기간 앙금이 쌓인 게 한일 관계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화해, 치유재단 해산, 초계기 레이더 갈등 등으로 최근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 복합적이고 중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해묵은 감정을 털어버리는 방법은 진정 없는 걸까? 근본적으로 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과거사에서 출발했기에 결국 역사적 문제에 고정관념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시작이다. 하지만 서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의견을 나누는 대화를 하지 못한다. 각자 믿는 것만 얘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루는 프랑스와 영국 친구들과 조를 이뤄 이야기를 나눴다. 이 친구들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다가도, 역사가 관련되면 주저하는 우리와 일본친구 관계와는 달랐다. ‘그때 너희가 이랬는데 알고 있니? 그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됐어. 아 알고 있지. 그거는 정말 우리가 잘못한 거야. 근데 이 부분은 내가 알기에는 이건데? 어 나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여전히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선입견을 품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놀라웠다. 서로 알고 있는 부분이 다르다면 상대방 의견에 귀를 더 기울이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유키와 둘이서만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단둘이 있을 때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중에 우리가 나이 들어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의 한국과 일본이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 있는 벽을 넘고 싶다. 완전한 평화를 이루고 싶다. “유키야, 있잖아…”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정재원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