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단양 잔도와 장미터널

입구로 들어서면 옥빛인 듯 녹빛인 듯 파란 강물이 눈부시다. 몇 걸음 들어가니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다리 위를 걸으면 강물 위를 거니는 듯 걸음이 가뿐하다. 흐르는 듯 멈춰선 듯 잔잔한 강물 속에는 진초록 산자락이 거꾸로 박혀있다. 강물 위에 온갖 시름 내던지고 어느덧 ‘묵언(默言) 명상’의 길로 빠져 든다.

옥빛 강물 따라 걷는 낭떠러지 산책길

자연을 맛보기 위해 인공을 가미하는 방법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을 멀리서 바라 보는 것도 좋지만 벼랑 위를 직접 걸어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단양잔도(棧道)’ 길은 그런 즐거움을 선사한다.

▲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단양 잔도 입구에서 바라본 잔도. 멀리 강 뒤쪽으로 덕절산과 도락산이 보인다. © 김유경

‘잔도(桟道)’는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말일 수 있다. ‘나무 사다리 잔(棧)’ 자를 써서, 벼랑에 선반처럼 매단 길을 뜻한다. 산세가 험준한 계곡에 통행로를 만들고자 고안한 방식이다. 중국에서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후난성 장가계 천문산의 ‘귀곡잔도(鬼谷棧道)’나 ‘유리잔도’ 등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2017년 만들어진 충북 단양의 잔도가 유일하다시피하다. 단양읍 상진리 상진대교에서 단양강변을 따라 적성면 애곡리까지를 1.2km에 걸쳐 ‘나무 사다리길’이 이어진다. 절벽 안으로 터널을 뚫거나 절벽을 따라 콘크리트 다리를 놓으면 쉽게 길을 낼 수 있지만 바쁘고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와 달리 잔도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해준다.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 위로 클래식 선율

▲ 단양잔도는 강 수면 위 20~30m쯤 되는 절벽에 매달려 있다. 잔도 아래 바위틈에 솟아 있는 나무들이 강물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 유연지

잔도 오른쪽으로는 녹음이 짙은 산자락이 끝나면서 드러난 거친 석벽이 잔도와 나란히 서 있고, 반대쪽에는 강물이 느릿느릿 흐른다. ‘느림보 강물길’이라 이름 붙여진 절벽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 나온다.

봄, 여름, 가을까지 햇살이 따가운 날도 양산이나 선크림이 필요 없다. 잔도 위에 덮개지붕이 설치돼 있는데다 오전에 잠깐 햇볕이 들었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 깎아 지른 절벽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우거진 숲 아래 강바람까지 보태면 청량한 느낌이 그지없어 피서지로서도 적격이다.

▲ 잔도를 따라 절벽 위에 솟아 있는 나무그늘 사이로 걸어 가면 숲 속을 트랙킹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 김유경

단양잔도는 관광용으로 만든 길이지만 중국의 잔도는 역사적 유래가 있는 곳이 많다.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桟道, 暗渡陳倉)

중국 병서 <삼십육계> 중 제8계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 유방은 초나라 항우보다 먼저 관중을 점령했다가 항우의 노여움을 사 홍문연 암살 위기를 모면한 뒤 파촉의 한중 땅으로 쫓겨난다.

유방은 친링산맥의 험준한 계곡을 따라 난 잔도를 통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책사 장량의 진언에 따라 잔도를 불태운다. 한중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유일한 출입로인 잔도를 없앰으로써 관중을 넘볼 마음이 없다는 뜻을 항우에게 보여준 것이다. 장량이 잔도를 불태우면서 노린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함께 간 병사들을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 놓고 마음껏 훈련을 시키면서 군사력을 길렀다.

한중 땅에서 군사력을 키운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관중 정벌을 준비하면서 심복 번쾌를 보내 불태웠던 잔도를 수리한다. 관중을 지키던 초나라 장수 장한은 항우에게 ‘잔도 수리에 1년은 걸리니 그때쯤 유방이 공격해올 것’이라 보고하고 잔도 쪽 방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유방은 대장군 한신으로 하여금 험준한 산맥을 돌아 몰래 진창이란 곳으로 진출해 관중을 기습 점령한다. ‘겉으로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을 건너’ 천하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

파촉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던지 당나라 시인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를 남겼다.

▲ 중국 후난성 장가계의 천문산에 있는 귀곡잔도. 깎아지른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설치돼 있다. © 모두투어

‘촉도를 가기 어려움이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나니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며 탄식하노라’

잔도를 통해 북벌을 추진했던 촉나라의 군사 제갈량은 좁은 잔도를 통해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목우유마(木牛流馬)라는 소형 수레를 발명했다는 고사도 전해 온다.

▲ 단양잔도를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바닥을 철망으로 만들어 놓은 ‘철망잔도’가 있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 보여 강물 위로 비치는 절벽과 나무들을 볼 수 있다. ⓒ 유연지

비록 중국 이야기지만 고사를 떠올리며 잔도에 관한 공부도 하면서 체험하는 기분으로 단양잔도를 걸으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상진대교 쪽에서 적성면 애곡리 방향으로 걷다 보면 중간에 철망잔도가 나타난다. 20m쯤 되는 높이에 걸려 있는 잔도라 철망을 통해 강물을 내려다 보면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지만 시원한 느낌도 준다.

지난달 30일 잔도에 서서 사진을 찍던 촬영하던 이재천(77·서울시 잠실)씨는 “이곳에 몇 번 왔는데 올 때마다 경치와 걷는 기분이 다 달라서 참 좋다”며 “스카이웨이, 사다리길, 고수동굴, 장미터널도 있어 한나절 걷기에는 딱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벌써 두 번 이상 이곳에 왔다는 이씨는 “이번에는 서울에서 친구들을 데리고 함께 왔다”고 말했다.

90도에 가깝도록 가파르게 서있는 석벽을 유심히 살펴 보면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호랑이 얼굴 형상의 문양이 나타난다. 이기석 문화관광해설사는 “어떤 분은 산은 호랑이의 기운을 드러내고, 남한강 물은 용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으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형상으로 강물이 굽이쳐 흐른다는 풀이도 한다”고 말했다. 김영규 단양군청 주무관은 “남한강 험한 물줄기를 호랑이 바위가 잠재운다는 전설이 있다”며 “해가 지고 어두워져 조명이 은은하게 비칠 때가 경관이 좋다”고 추천했다.

▲ 절벽 위에 걸려 있는 잔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경관. 절벽 위의 나무들이 강물에 비쳐 보인다. ⓒ 유연지

만학천봉이 한눈에…만천하 스카이워크

잔도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데크로 연결된다. 산 위를 올려다 보면 남한강 수면에서 80∼90m쯤 되는 높이에 25m 정도 되는 스카이워크가 있다. ‘만천하 스카이 워크’다. 바닥에서부터 나선형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을 따라 꼭대기 전망대에 이르면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눈에 들어 온다. ‘골짜기가 만 개, 봉우리가 천 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물을 흘려주는 골짜기가 봉우리보다 많으니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물은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고, 산은 그 물을 품고 있는 생명의 곳간이다. 예전에 이곳은 선비나 상인들이 영남 지방에서 죽령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남한강 상류는 유속이 빨라 물이 S자를 그리며 굽이쳐 돌아 흘러 간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명당이라고 하는 터다.

▲ 남한강 수면 위 100여m 높이 스카이워크에 올라가면 단양읍내 전경과 소백산, 금수산, 월악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단양군청

바닥이 투명한 고강도 유리로 돼 있어 아득하게 낮은 남한강 물을 내려다 보며 걸을 수 있고, 구단양과 신단양 읍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만천하 스카이워크에 따르면 작년에만 82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스카이워크는 구단양과 신단양의 가운데쯤에 있다. 이기석 문화관광해설사는 “원래 단양은 소백산 자락 단성면에 있었는데, 태백산 자락의 신단양으로 오면서 도담삼봉과 온달관광지, 구인사 관광이 활성화했다”며 “신단양 쪽에 사람이 몰리면서 구단양 쪽을 개발한 것이 스카이워크나 잔도”라고 말했다. 중앙선 열차가 지나 다니는 상진대교도 아치형 트러스가 아래 위로 유려하게 설치돼 남한강 굽이와 잘 어울린다.

운동을 겸해 잔도 트랙킹을 하려면 상진대교에서 출발해 잔도를 거쳐 스카이워크까지 걸어 올라가는 코스가 좋다. 반면 힘들지 않게 걸을 생각이면 스카이워크 주차장에 주차하고 스카이워크부터 본 뒤 반대방향으로 내려 오는 코스가 좋다.

▲ 단양잔도에서 장미터널로 가는 중간에 가꿔놓은 메밀밭.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뒤쪽으로 야산자락이 강물에 반사된다. ⓒ 유연지

적성면 애곡리에서 출발해 상진대교까지 잔도를 걸어 오면 강변 둔치에 메밀밭이 나타난다. 이곳은 몇 년 전만 해도 잡풀과 잡목이 우거지고 쓰레기 더미로 뒤덮여 있던 곳이다. 단양군이 지난 3월 한국수자원공사와 충주댐 수변지역 경관조성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메밀밭으로 조성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질박한 소금빛 메밀꽃이 길게 펼쳐져 있다. 메밀밭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서 건너다보는 강 건너 풍경도 일품이다. 야트막한 산자락이 강물에 비친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다. 메밀밭 중간 곳곳에 벤치가 있어 지친 발걸음을 잠깐 쉬었다 가도 된다.

잔도 반대쪽엔 1.2km 장미꽃길

메밀밭이 끝나는 데서 고수부지에서 제방길로 올라서면 화려한 장미꽃길이 나타난다. 단양고등학교 앞에서 상진리까지 1.2㎞ 구간에 1만5천여 그루 장미가 꽃을 피우고 있다.

▲ 단양잔도에서 메밀밭을 지나 제방길로 올라가면 장미터널이 나타난다. 1.2km 장미꽃길 중 450m 구간은 장미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 김유경

단양군이 2009년 조성해 매년 5월 장미축제를 열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450m 길이 철제 구조물이 터널을 만들어 연인들은 물론 부부들의 산책 코스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철제망을 진붉은 장미꽃들로 장식해 놓아 아늑한 꽃길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 장미는 오뉴월에 한창 핀다. ⓒ 김유경

편집 :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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