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지리산 역사 탐방

산악인들은 산을 돌이냐 흙이냐에 따라 남성산과 여성산으로 나눈다. 지리산은 여성산이다. 대부분 흙으로 덮인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불린다. 태백산, 설악산 등 한반도의 많은 산이 화강암을 비롯한 바위와 돌로 이뤄진 골산(骨山)인 것과 비교된다. 일찍이 이중환은 <택리지>에 지리산을 두고 ‘지역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따뜻하여 산중에는 대나무가 많고 감과 밤이 매우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며 ‘기장이나 조를 높은 산봉우리 위에 뿌려 두어도 무성하게 자란다’고 적었다. 생명을 품어주는 산, 지리산이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다.

‘어머니 산’은 기름진 동시에 골이 깊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뻗는 산줄기와 남쪽으로 뻗으며 경남과 전남을 가르는 산줄기, 서쪽으로 뻗으며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산줄기는 전체 길이가 140㎞나 된다. 이 산줄기들은 저마다 수없이 곁가지를 치며 그 사이사이에 깊고 긴 골짜기를 이룬다. 이중환이 ‘산 안에 100리나 되는 긴 골이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쪽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고, 나라에 세도 바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처럼 주름진 골마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수많은 아픈 역사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탐방단(단장: 이봉수 교수)이 만나러 간다.

▲ 지리산의 신록이 빛나는 능선, 그 결을 따라 주름진 계곡들이 펼쳐진다. ⓒ 권리환

아! 지리산이여…

지리산의 뱀사골탐방안내소 2층에는 여느 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서는 볼 수 없는 전시물들이 탐방객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임해영 해설사는 해설에 앞서 이곳을 보는 탐방객들에게 마음가짐을 정돈하길 권한다.

“여기는 국립공원이니 지리산에 오시는 분들은 다 즐거운 마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십니다. 스트레스도 벗어놓고 무겁던 머릿속도 비우고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가 가시는데요. 이곳만은 조금은 정돈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시고 들어가는 추모의 장입니다.”

▲ 뱀사골탐방안내소 2층 투명한 아크릴 바닥 아래 전시된 무기들. 50년대 빨치산과 토벌대가 실제로 사용한 것들이다. ⓒ 권영지

‘아! 지리산이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는 이곳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분과 회한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엄숙한 마음으로 한발짝을 디디면 투명한 아크릴 바닥 아래로 보이는 낡고 오래된 무기들이 탐방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영화와 드라마로 현대식 무기들이 더 익숙한 젊은 세대에는 둔탁한 고철이나 조잡한 모형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외형과 달리 이 무기들에는 50년대 빨치산과 토벌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역사가 서려있다. 한반도 남쪽,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빨치산과 토벌대의 역사다.

지리산의 마지막 총성

뱀사골탐방안내소에는 여성 빨치산인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갖고 있던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후의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이 생포된 것은 1963년 11월,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3개월이 지난 뒤였다. 임해영 해설사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정순덕이라는 사람은 만 16살 때 결혼합니다. 그리고 18살 때 남편을 따라서 빨치산이 돼요. 정순덕 씨는 원래 내원골에 살던 주민이었어요. 열 여섯이면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죠. 그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 입이라도 하나 덜자는 생각으로 결혼을 해요.”

결혼 후에도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도 조실부모한 집안이었고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추격을 받아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는 취조를 버티지 못하고 남편의 옷가지를 싸 들고 남편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갔지만 만난 지 20일만에 남편은 빨치산 활동 중 사망한다. 남편이 죽고도 13년 동안 빨치산 활동을 하던 그는 63년에 생포가 되었지만 비전향장기수의 길을 선택한다.

▲ 정순덕이 생포될 때 갖고 있던 소지품. ⓒ 권영지

지리산의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총맞아 죽고. 솜 한 장 겨우 덧대 누빈 옷가지와 방한모, 낡은 신사화로 버티기에 지리산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양민이었던 그가 13년을 버티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데올로기’라는 다섯 글자로는 풀 수 없는 의문을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는 <남부군>에서 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현저한 동인(動因)은 농지문제에서 그랬듯이 이론이나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었고 ‘한’이었다고 생각한다. 빈곤에 대한 ‘한’,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괄시,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반발, 특히 일부 우익 청년단체와 우익계 사회단체의 초법적인 횡포에 대한 분노가 반사적으로 좌익 동정자를 만들었고 그에 대한 탄압이 다시 좌익 동조자로 굳혀버리는 예는 결코 드물지 않았다. (…) 한 대 맞고 나온 젊은이들은 좌로 기울었고 두 번 당한 청년은 진짜 '빨갱이'가 됐다.’

원래는 명예로운 이름 ‘빨치산’

빨치산 하면 지금도 ‘지리산 공비’ ‘지리산 빨갱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빨치산의 본딧말인 ‘파르티잔(Partisan)’은 명예로운 이름이다. 파르티잔은 프랑스어인 ‘파르티(Parti)’에서 가져온 말로, 원래 ‘당원, 동지, 당파’를 뜻한다. 이것이 이념 분쟁 과정을 거치며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 빨갱이다. 도올 김용옥은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인민’ ‘좌익’ 등의 개념이 ‘오염’됐다고 지적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 제3조에는 이렇게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대한민국 헌법의 원조인 임시헌장에도 ‘국민’이 아닌 ‘인민’이 등장한다. 도올은 ‘인민’은 그저 ‘보통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해방 이후 미국 힘을 빌려 정권을 잡은 이승만과 그 세력이 자기네 반대파인 좌익계열에게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덧입혔다는 것이다. ‘빨갱이’로 낙인 찍힌 이들은 그저 ‘누구나 잘사는 사회’를 꿈꾸던 보통사람들이었다. 이태는 <남부군>에서 좌익 동조자 가운데는 공산당이 무엇인지 정확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공산’이라는 용어를 ‘고루 잘 사는 세상’으로 생각하고 은근히 동경하던 빈농과 도시빈민이 다수였다는 것이다.

최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인용하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신독재 4단계’에서 2단계가 ‘적을 끊임없이 만든다’이다. 이승만은 자기 권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반대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이태는 좌익동조자를 만든 것은 우익세력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이런저런 동인으로 해서 6·25 전 남한 천지에 그 많은 좌익 동조자들을 만들어낸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남한의 극우세력이었다. 요컨대 전쟁 전 좌익 동조자의 상당 부분은 정확히 말해서 사회불만층들이지 진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와 지리산 공비, 그 사이 어디쯤

사상적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들은 독립을 이룬 뒤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찍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다양한 사상적 대안이 나오게 된다. 그중 지식인 사이에는 독립 뒤 모든 인민이 공동분배를 해 누구나 잘사는 사회를 이룩하려는 공산주의 사상이 각광을 받았다. 공산주의를 공부하려고 러시아와 중국에 유학을 갈 정도였다. 이현상도 그중 하나이다. 그래서 빨치산 간부들 중에는 지식인이 많았다. 이태는 <남부군>에서 그들에 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린다.

‘목욕을 하고 나서 저녁식사 때까지는 민주지산 이후의 무용담들을 서로 교환하느라고 떠들썩했다. 남부군 간부들 중에는 문인, 학자, 예술인 등 소위 지식인이 많이 끼어 있었다. 이들이 그 얼마 전 가야산 해인사를 습격했을 때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려대장경판(소위 팔만대장경)의 보존 상태가 어떠니, 그래가지고 불이라도 나면 어쩔 셈인지 모르겠다니 하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같은 문화유산을 아끼고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끼리 피를 흘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새삼스레 실감하는 느낌이었다.’

1905년 9월 27일, 충남(당시 전북) 금산군 군북면에서 3백석쯤 하는 부농 이면배의 넷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이다. 이현상은 전북 고창고보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해 중앙고보를 졸업한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 독립운동을 하던 박헌영을 만나 공산당운동을 함께하게 된다.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해 기소유예처분을 받기도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독립운동가였다.

▲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기록된 이현상. ⓒ 국사편찬위원회

이현상은 19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건너간다. 당시 상해는 민족운동의 거점지였다. 그는 망명 청년들 모임인 ‘한인청년회’로 활동하다 귀국한다. 그 뒤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자 지하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경성콤’을 만들어 활동하다 해방 직전 일본경찰을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이현상은 일제 치하에서 12년간 옥살이를 했다. 존경받아 마땅할 독립운동가가 어쩌다 ‘지리산 공비 우두머리’로 불리게 됐을까?

지리산 누비는 빨치산 대장

해방 후 지리산에서 내려온 이현상은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한다. 하지만 미군정의 압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숨을 고른다. 유학 후 이현상은 고국으로 돌아와 남로당의 지령을 받는다. 그는 여수에서 패잔병이 되어 지리산으로 숨어든 14연대 부대원들을 이끌게 되는데, 이들은 제주도로 가서 양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거역한 군인들이었다. 이현상은 그들을 거두어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조직한다. 이것이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이다.

6·25전쟁이 시작되며 빨치산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현상 부대는 월북을 결심하고 북상하던 중 전쟁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다시 낙동강전선에 배치받아 활동했는데, 9월15일 유엔군과 한국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상황이 다시 뒤집어졌다. 북으로 후퇴하던 이현상 부대는 다시 당의 명령을 받고 남하한다. 이들은 덕유산 송치골에서 도당회의를 열어 ‘남부군’이라는 대규모 군사조직 체계로 개편한다. 이때 이현상은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한다.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850명은 남쪽으로 진군하며 속리산과 덕유산을 지나 다시 지리산에 자리잡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를 잃어버린 북한 정규군, 인민위원회 주도세력, 우익단체의 보복이 두려워 도망친 사람들이 산으로 모여들었다. 전쟁 기간 이 일대에는 2만여명이 모여들어 남한 내 인민공화국 지대가 만들어졌다.

당시 빨치산토벌대장이던 차일혁은 적과 아군을 떠나서 이현상을 대단한 존재로 평가했다. 차일혁의 판단으로 한반도는 게릴라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최소한 게릴라 활동을 하려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활동한 중국처럼 광활한 지역이 필요한데, 한반도는 그렇지 못했다. 협소하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내륙은 어디든 4시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상은 그런 악조건에도 강력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전쟁 중 충북 청주를 습격했을 때는 그 여파로 충북도경국장이 경질되고 경비과장이 해임됐다. 이현상은 저돌적인 인민군이었지만 불필요한 인명은 희생시키지 않았다. 전투 과정에서 죽인 군경은 어쩔 수 없지만 포로로 잡힌 군경에게는 무기만 회수하고 살려서 보내줬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불리한 지형에도 성공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능력과 적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면모를 높이 샀다.

죽음을 선전하는 삐라

▲ 이현상의 사살을 알리는 삐라. ⓒ 차일혁기념사업회

‘지난 각지구당 위원장 회의때까지 5지구당 위원장으로서 당신들을 지휘하던 이현상은 사살되었다. 그 시체는 대한민국 국경의 손으로 따뜻이 묻힐 것이다.’

그 무렵 북에서는 이현상의 스승이나 다름없던 박헌영이 숙청당한다. 이는 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기 시작하자 빨치산 내부에서도 총사령관인 이현상의 지위를 격하하는 조처가 단행됐다. 그가 차일혁 부대에게 사살되기 1개월 전이었다. 한때 지리산을 호령하던 남부군 총수 이현상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북과 남,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이때 이현상에게는 하수복이라는 산중처가 있었다. 그녀는 빨치산 간호병이었는데 당시 배속에 이현상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처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차일혁에게 밀사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 밀사가 자신의 처, 하수복이었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만큼 이현상은 절박했다. 차일혁은 밀사로 온 하수복을 만났다.

이후 이현상을 만나기 위해 접선장소를 정한 뒤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제1대대장 김동진 경감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때 빨치산 강경파들은 이현상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접선장소로 나온 김동진 경감을 살해해 이현상의 소행인 것처럼 꾸민다. 그런 상황을 알지 못했던 차일혁은 이현상의 간계에 빠진 것으로 알았다. 결국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은 차일혁 부대에 의해 지리산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는다.

▲ 지리산 자락에 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 권영지

地異風雲堂鴻洞(지리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벌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念向時非祖國(일념향시비조국)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有血(흉유만갑심유혈)

가슴에 단단한 각오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이현상이 사살되었을 때 품속에서 나온 한시)

빨치산의 산중생활기

▲ 피아골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염성준 씨. ⓒ 권영지

빨치산들의 산중생활은 어땠을까? 염성준(75) 씨는 지리산 피아골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마을을 오가던 빨치산들을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빨치산들이 저 위에는 담배가 없으니까 밑으로 민가에 내려와. 밤에 내려와서 털어가지고 올라가다가, 오두막 지어 놓고 농사를 짓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담배를 노나 피고 그랬다구.”

▲ 달궁마을 느티나무. 빨치산들은 이 나무 그늘 아래서 무기를 재정비하고 대기시간과 휴식시간, 오락시간을 보냈다. ⓒ 권영지

피아골에서 차로 1시간 30분 남짓 가면 나오는 달궁마을은 빨치산들 ‘단합의 장’이 열렸던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당 사업을 마치고 돌아온 빨치산 유격대들이 무기를 정돈하고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이태는 이곳에서 정식 입당절차를 밟고 조선노동당 요원이 됐다. 그는 <남부군>에 달궁마을에 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남부군 사령부는 달궁골에서 네 번째의 도당 위원장 회의를 소집했고, 10월혁명 기념일에는 가까운 전남, 전북, 경남 3도 유격사단의 씨름 선수들을 모아 사단 대항 씨름대회를 열었다. 그날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성대한 오락회도 가졌다.’

빨치산들은 달궁마을에서 교양을 쌓기도 했다. 빨치산 최문희 문화지도원은 등사판으로 ‘50곡집’ ‘20곡집’ 등 가사집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나눠주고 틈틈이 노래 공부를 시켰다. 이태는 그녀에게 번역된 소련 군가와 가요를 수십 가지 배웠다고 한다. 노래 공부도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여긴 것이다. 빨치산 박형규 교양지도원은 각 대대를 돌며 10월혁명 기념일에 발표된 김일성의 ‘10월혁명과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이라는 논설과 ‘해방 후 조선’이라는 시사강좌를 진행했다.

▲ 달궁주차장. 빨치산 여러 병단이 모여 기념식을 하고, 공을 차고, 씨름대회를 했던 곳이다. ⓒ 권영지

고향을 떠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채 지내야 했던 산중생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토벌군과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을 빨치산들에게 달궁마을의 시간은 산중에서 맛보는 산딸기처럼 달콤했을 것이다.

빨치산과 반달가슴곰은 같은 길을 다닌다

▲ 임해영 해설사가 지리산 모형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권영지

빨치산은 어떻게 활동 했을까? 빨치산의 길은 지금 우리가 아는 길과 다르다. 지리산의 이름난 골짜기들, 천왕봉, 명심봉,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오는 주능선을 빨치산은 피해 다녔다.

바람도 세고 추워서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는 이 길은 등산객의 사랑을 받을지언정 빨치산에게는 쉽게 들킬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래서 빨치산은 주로 7부능선이나 8부능선을 탔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이런 길을 빨치산보다 일찍이 다녔던 동물이 반달가슴곰이다. 계곡을 따라 물과 식량을 구하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은 사람과 야생동물에게 같았던 것이다. 그 길에 나 있는 키 작은 대나무인 조릿대도 반달가슴곰과 빨치산의 연결고리다. 임해영 해설사의 설명이다.

“가다 보면 키 작은 대나무 보이시죠? 산죽이라고도 하고 조릿대라고도 하는데 이게 빨치산과 관련된 나무입니다. 불을 태우면 연기가 안 난다고 해요. (빨치산들이) 조릿대를 겨울에 잠자리로 깔기 위해서 사용했는데 재밌는 것은 반달가슴곰도 조릿대로 둥지를 만들어요. 곰이 다닌 길을 빨치산이 다니고, 빨치산이 다닌 길을 반달가슴곰이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은 하나라는 거죠.”

반달가슴곰과 빨치산은 사냥과 전쟁으로 토벌된 비극적 운명까지 닮았다. 주능선을 피해 7부, 8부 능선으로 다니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들은 토끼몰이식 작전을 폈다. 1951년 11월에는 백선엽 장군이 주도하는 ‘백선엽 야전전투사령부’, 이른바 백야전사령부가 창설되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썼던 작전 이름이 쥐잡이 작전이다. 빨치산은 ‘쥐’였다. 토끼몰이식으로 토끼를 가운데 넣고 빙 둘러싸 한곳으로 몰아서 잡는 작전이다. 지리산 둘레에서 토벌대들이 밀고 올라오면 빨치산들은 높은 곳, 주능선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빨치산들이 주능선으로 몰리면 항공기가 날면서 폭탄을 투하한다.

“그때 폭탄만 투하한 게 아니에요. 석유 드럼통을 던지고 거기에 소이탄을 쏘면 그게 어떻게 돼요. 폭발하면서 지리산 일대가 불바다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빨치산들도 타 죽고. 주능선에는 그렇게 해서 자연도 많이 훼손됐던 거구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 ‘아군’

▲ 임해영 해설사가 빨치산 아지트였던 장소로 안내하고 있다. ⓒ 권영지

토벌을 피해 빨치산들은 더 찾기 어려운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뱀사골탐방안내소에서 40여분 정도 탐방로를 따라 걸어가면 와운골과 뱀사골의 물이 합쳐지는 요룡대가 나온다. 요룡대까지 가기 전, 지금은 탐방로에서 빗겨나 길잡이 없이는 알 수 없는 공간이 있다. 계곡의 습기를 먹어 촉촉하게 이끼가 낀 바위들을 조심스레 밟고 걸으면 눈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난다.

큰 바위 일여덟 개가 뒤엉켜 만든 석실이 나온다. 석실은 이름처럼 바위들이 만든 공간이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면 포개진 바위만 보이고 계곡의 특정 위치까지 와야 틈 사이로 입구가 보인다. 성인 7,8명이 설 수 있는 공간이다. 부슬비가 내리는데도 석실에 들어서니 입구 반대쪽 너머 바위틈으로 빛은 들어오는데 비는 피할 수 있었다. 비바람뿐 아니라 토벌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곳은 노동신문 전북판과 여러 선전물을 만들던 출판사로 이용됐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야전병원으로도 쓰였다.

▲ 빨치산들의 아지트로 사용된 석실의 입구. ⓒ 권영지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지형을 이용해서 수많은 ‘트’(아지트, 은신처)와 ‘비트’(비밀 은신처)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 생활기반을 갖추었다. 토벌대의 눈을 피해 낮에는 잠을 자고 주로 밤에 생활했다. 토벌대는 지리산에서 신출귀몰하는 빨치산을 잡기 위해 기막힌 ‘묘수’를 냈다.

‘보아라부대’는 귀순 빨치산들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부대이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 신분을 바꾸어 빨치산을 잡으러 다시 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 동족간에 살육전을 벌인 것부터가 비상식적이었던 6·25는 이러한 상식을 초월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신기남, ‘한국 현대사의 증언: 6·25와 빨치산-빨치산 토벌대 ‘지리산 보아라 부대’’(역사비평 4, 1988))

마을 전체가 한날 지내는 제사

당시 지리산 주민의 피해도 막대했다. 지리산 일대에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었다. 낮에 군경토벌부대가 오면 태극기를 게양하고, 밤에는 인공기를 달아 토벌부대와 빨치산의 추궁을 모면하려는 주민들의 어쩔 수 없는 신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리산에서 가장 무서운 총은 ‘손가락총’이었다. ‘손가락총’의 주인은 같은 마을 주민이었다. 임해영 해설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아 저 사람은 북한군 빨치산에 부역을 했어요 가리키면 그 자리에서 총성이 빵. 즉결처분이에요. 밤에 빨치산들이 그 마을에 들어와서 낮에 저 사람은 군인들에게 협조했어요 하면 그 자리에서 빵. 그게 ‘손가락총’이에요.”

▲ 피아골 평도회관 어르신들. 가운데가 임옥순 씨. ⓒ 권영지

지리산 피아골 평도회관에서 만난 임옥순(83) 씨는 자기 시숙이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는 빨치산 토벌대가 마을 주민을 다 나오라고 부른 뒤 몽둥이로 시숙을 팬 다음 도로에 눕혀 놓고 그에게 돌을 던지라고 주민들에게 시켰다고 했다. 주민들은 토벌대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돌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주민들은 연좌제의 사슬에 걸려 계속 감시와 시달림을 받았다. 평도마을에는 지금도 한날에 제사가 많이 몰려있다. 그 고통은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모두가 피해자다.

2만명이 사라진 반쪽의 역사

▲ 지리산지구 전적기념비. 충혼탑 앞 ‘5인의 용사상’ ⓒ 권영지
▲ 뱀사골탐방안내소 옆 토벌대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 권영지

뱀사골탐방안내소 뒤편에는 전쟁기념비와 충혼탑이 자리하고 있다. 충혼탑은 원래 1955년 남원 광한루에 세워졌다가 198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충혼탑 뒤에는 조형물로 조성된 ‘기억의 통로’가 있다. 충혼탑 앞 ‘5인의 용사상’을 지나 부조물과 동상에 새겨진 경찰, 군인, 주민들을 보면서 ‘기억의 통로’를 지나가면 통로 가운데 수많은 이름이 써진 비석을 만난다. 까만 화강암 석판으로 만들어진 전쟁기념비에는 7287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돼있다. 7287명은 토벌대로 활동했던 경찰과 군인,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까지 세 종류 이름뿐이다. 지리산에 있었다는 2만명 빨치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노고단, 지리산 빨치산의 서막

▲ 노고단 수양관. 수많은 빨치산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 권영지

“할머니 한 분의 증언이 있어요. 빨치산 토벌할 때 지리산 주민들을 밖으로 다 내보냈는데요. 이분이 소개령으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셔서 밭을 일구는데 처음에 밭을 일구니까 뼈가 나왔대요. 그때는 깜짝 놀랬대요. 그 다음날 일구는데 또 나와 놀랬대요. 사흘째 일구는데 또 나오니까 그때는 안 놀랬대요. 사람이 그만큼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빨치산은 주민들 기억 속에 이름 대신 뼈로 남아있다. 노고단대피소를 내려오다 보면 그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산등성이로 보이는 낡고 무너져 가는 건물의 잔해다. 옛날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다는 외국인 별장촌인 수양관이다. 임해영 해설사는 지역 주민들 중에는 이곳 수양관에서는 한 트럭 분 이상 인골이 나왔다는 증언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빨치산의 인골로 추정되고 있다. 군인이 사망했을 때는 따로 묘를 만들기 때문이다.

수양관이 불탄 이유는 여수·순천 사건 진압 이후 지리산으로 도피한 14연대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여수에 주둔했던 14연대는 1948년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 경찰타도, 남북통일을 위해 북상하는 인민의 군대로 행동할 것’을 호소하며 제주도 파병 명령을 거부했다. 순식간에 순천, 벌교 광양, 곡성까지 점령했지만 정부의 계엄령과 토벌로 종말을 맞는다.

한 달 이상 노고단을 근거지로 버티던 14연대는 당시 중대장인 김지회 중위가 지휘해 달궁계곡을 따라 이동한다. 그 이듬해 달궁계곡 끝자락, 반선마을에서 반란부대장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되면서 여수·순천 사건은 완전히 막을 내린다. 그러나 여수·순천 사건의 끝은 불행히도, 동족상잔의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잔여 부대원들이 야산대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정규군 형식을 갖춘 지리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지리산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온 흔적

▲ 6월이면 노병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뱀사골탐방안내소. ⓒ 지리산국립공원

뱀사골탐방안내소에는 6월이 되면 노병들이 많이 온다. 임해영 해설사는 “휠체어 밀고 지팡이 짚고 가슴에 훈장을 번쩍번쩍 달고, 대형버스를 타고 많이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빨치산이었다, 빨치산의 후손이었다고 온 탐방객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는 “찾아와도 조용히 왔다 가시는 것 같다”며 ”좀 안타깝다”고 말했다. 좌우 대립의 상흔은 여전히 지리산 자락에서 씻겨나가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듯하다.

지리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지리산에 남아있던 반란군 잔여세력을 기반으로 지리산 빨치산을 만들었다. 반란군 잔여세력은 원래 김지회, 홍순석이 지휘한 14연대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몸 담았던 14연대는 여수에 주둔해 있었고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부대였다. 제주도 출동은 1948년 일어난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떨어진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제주4·3사건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유엔의 단독 선거 결정과 전국적 단독선거 반대 시위, 그중 제주도에서 일어난 경찰의 발포가 불씨였다. 정치·사상적 갈등과 대립으로 혼란한 화약고 속에 던져진 불씨.

‘같은 클라스메이트인데 우린 참 즐거웠어요. 다방에 앉아 문을 닫을 때까지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았던지…… 결국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 헤어졌지요. 그의 아버지는 이승만의 충실한 공무원이었거든요. 전 공산당은 모르지만 인민의 나라가 돼야 한다고 믿었고 이승만과 한민당이 정권을 잡는 것은 인민의 불행이라고 믿었었지요. 그 인민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이북이 과연 그런 나라인지 그건 모르지요. 결국 뭐가 뭔지 모르면서 이대로 가버리는 거지요.’ (이태 <남부군>)

▲ 지리산 뱀사골 계곡. 긴 세월 물이 흘러내렸으니 핏자국이야 씻겨졌겠지만 마음과 역사의 상흔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 권영지

지리산의 역사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흘러가고 있다. 그나마 제주4·3사건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지정되어 국가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럼에도 부족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보상을 촉구하는 4·3사건특별법 개정은 1년 반 가까이 국회에 계류중이다. 여수·순천 사건과 지리산 빨치산의 현장과 역사는 묻혀진 채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여수‧순천 사건과 지리산 빨치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부군> 머리말에서 이태는 이렇게 말한다.

‘이 회상기에서 대학생이던 한 청년은 말한다. “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 주세요.” 그 목소리는 언제나 생생하게 내 귓전에 남아 나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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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박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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