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다뉴브강 참사 보도

▲ 박서정 기자

아담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사람은 자신과 관련이 적은 사안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중국의 재난에 유럽인의 관심이 적은 이유를 설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사는 청 제국이 통째로 지진에 삼켜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쪽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느 유럽 사람에게 이 끔찍한 재난 소식이 무슨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보자... 그는 그럴 듯한 철학적 의례를 거치고 인도적인 감상을 적당히 표현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일 그가 제 작은 손가락을 잃어버릴 예정이라면, 그는 오늘 밤을 지새울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중국인들을 본 적이 없으니 폐허를 두고도 아주 편안하게 잘 수 있다... 자기 손가락과 그 사람들의 생명을 바꾸는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그는 어느 쪽을 선택할까?'

뉴스 가치를 따질 때 중요한 관련성 요소 또한 이 믿음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졌을 때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더 관심을 보인다. 한국에서 8천km도 더 떨어진 다뉴브 강에서 벌어진 참사가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벌어진 일이니, 한국 신문이 31일 1면에 헝가리 유람선 침몰 기사를 올린 건 당연하다. 이 사건이 한국 사회와 관련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 1면 뒤 몇몇 기사를 보면 아담 스미스가 틀린 건지, 아니면 뉴스 가치 관련성의 기준이 잘못된 건지 헷갈린다.

▲ 다뉴브 강 마가리트 다리. ⓒ Pixabay

<조선일보>는 1면을 타 언론사보다 다뉴브 참사에 작게 할애했다. 현송월 처형 보도와 그의 평창올림픽 때 ‘재림’ 이후 북한 관료와 관련한 보도 신뢰성이 떨어진 와중에, 하노이 회담 책임자 처형 기사를 크게 내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일 김정은과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선>이 오보를 냈다는 것이 확인됐다. 어쨌든 그 때문에 다뉴브 참사 기사는 옆 귀퉁이에 작게 나갔다. 2면에는 ‘文대통령 "세월호 구조팀 보내라"… 靑, 대통령 지시 6번 걸쳐 공개’ 기사를 냈다. 이번 다뉴브 강 참사에 세월호를 연결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국내 타 언론사들은 물론 외신에서도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과 헝가리 정부가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 기사에 자세히 옮기는 데 집중할 때, 정부가 대통령 지시를 공개한다고 생색낸다는 듯이 비꼬는 기사를 우선으로 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중앙일보> ‘헝가리 선박회사가 배상 책임…참좋은여행사는 “60억 보험 가입”' 기사도 공감하기 어렵다. 미국 황색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룬다면, 미국 사회와 관련성이 낮은 사건이니 그렇게 접근할 수 있다. 관련성을 제쳐두더라도, 권위지를 자처하는 신문이 보험금 기사를 신속하게 내보내는 건 슬픔에 빠진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보도 태도라 할 수 있다. 보험금 이야기를 들먹이는 기사 하나로 <중앙>은 ‘인지상정’과 ‘권위’를 둘 다 버린 신문으로 독자에게 비치지 않았을까?

‘조의’는 영어로 ‘condolences’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접두사 ‘con-‘은 ‘with’ 곧 ‘함께’, ‘dolore’는 ‘suffer’ 곧 ‘고통받다’라는 뜻이므로 ‘함께 고통받다’라는 뜻이 된다. ‘조의’만큼이나 상투적으로 쓰이는 단어지만, 이 말을 할 때만은 ‘내가 당신과 함께 그 슬픔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신문이 독자의 공감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까?


편집 :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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