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전쟁과 평화’

▲ 박지영 기자

지난해 10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6.25전쟁 때 폴란드로 보내진 1500여명 북한 고아들과 이들을 보살핀 폴란드 보육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1951년 전쟁 당시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형제’라는 구호 아래 김일성이 사회주의 국가들에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고아들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면서 1500여명이 폴란드로 보내졌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추상미 감독은 인종도, 문화도 다른 폴란드 보육원 선생님들이 6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북한 아이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며 ‘왜 저렇게까지 그리워할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인종과 이념, 문화를 초월한 그들의 연대를 추적한다.

폴란드 프와코비체 기차역에서 선생님들이 북한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 눈에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이었다. 당시 남자아이 머리는 모두 ‘까까머리’였고, 여자아이는 모두 귀밑 ‘똑 단발’이었다. 폴란드어-한국어 사전도 없어 당장 말도 통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엄마’ ‘아빠’라 부르며 따랐고, 선생님들은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1959년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으로 돌아갈 때 아이들은 가기 싫어 일부러 병에 걸리려 했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설득해 억지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들은 철저히 ‘국가의 이익’에 따라 만나고 헤어져야 했다.

▲ 폴란드 보육원 선생님들은 북한 아이들이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지우고 폴란드에서 가족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려고 했다. ⓒ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폴란드 보육원 선생님들은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멀리 북한에서 온 전쟁고아의 모습은 선생님들의 어린시절과 똑같았다. 2차세계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은 선생님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들은 북한 아이들 머리 속에서 전쟁의 기억을 지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폭탄을 목격한 아이들이 침대 아래서 불안에 떨 때,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품에 꼭 껴안고 잠을 청했다. 보육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폴란드 선생님과 아이들은 서로 상처를 보듬으며 연대했다. 그들을 ‘부모형제’로 맺어준 것은 국가나 이념이 아닌, ‘생명 사랑’이었다.

상처를 보듬어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보육원이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폴란드 선생님들이 자기 상처를 북한 아이들 사랑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이 ‘세계 평화’를 위한 핵 담판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를 화두로 남북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전쟁에 따른 상처를 ‘인류애’로 승화해 평화를 맞이할 준비가 돼있는가? 우리나라 보수 정치세력은 여전히 ‘종북’,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앞세우고, 국회 제1야당 대표는 ‘반민특위 망언’을 내뱉었다. 분단으로 핍박받은 사람들이 지금은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 때문에 또 상처받고 있다. 이들의 상처는 아물 겨를이 없다.

한반도에서 핵만 사라진다고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안의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북한 적대와 혐오,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려면 엄중한 과거 청산을 통해 역사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제대로 된 과거 청산과 역사 인식이다. 역사에서 잊혀진 이들의 상처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첫걸음이다. 평화는 ‘북미 핵 담판’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폴란드 선생님들처럼 평화는 전쟁의 상처를 생명 사랑으로 승화할 때 찾아온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정소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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