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㊶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기원

전북 익산역. 코미디언 이주일 성공신화에 디딤돌이 됐던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의 상흔을 딛고 일어선 말쑥한 모양새다. 용산에서 고속철도로 1시간 15분여. 고작 강남·북을 오가는 시간이다. 역에서 나와 버스에 몸을 싣고 마한을 거쳐 백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던 풍요의 땅, 백제 무왕이 도성을 건설한 금마면으로 간다. 백제 사찰 미륵사 폐허 위에 다시 우뚝 선 미륵사지 석탑과 반갑게 만난다. 1990년대 중반 방송기자 시절 쓰레기와 심지어 배설물로 뒤범벅이던 미륵사지 석탑 보존복원의 필요성을 보도한 지 사반세기 만이다. 지난 12일 일요일은 불기 2563년 부처님 탄생의 석가탄신일이었다.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인 탑(塔, Pagoda)의 기원은 어디일까? 불교의 탑은 왜 생겨났고, 처음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지난달 30일 복원 공개한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 백제 무왕시기 639년 사택왕비가 시주해 만든 탑이다. 탑 1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물 형태다. ⓒ 김문환

국내 가장 큰 미륵사지 석탑

20년 세월 복원을 마친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 14.5m, 너비 12.5m, 무게 1830t으로 국내에서 가장 거대하다. 남북국(발해와 신라)시대 신라의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도 높이가 14.5m지만 미륵사지 석탑에 못 미친다. 미륵사지 석탑은 복원된 높이만 6층 14.5m이고, 원래는 9층 25m로 추정된다.

새롭게 단장한 미륵사지 석탑이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탑의 네 귀퉁이에 생뚱맞게 사람형상 보호석을 세워놓은 게 아닌가. 고려 말∼조선 초 조각이다. 백제 탑을 복원하면서 그보다 1000년 뒤 석상을 놓는 것은 부적절하다. 엄중한 복원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639년 건축,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2009년 1월 석탑 1층 내부에서 사리함이 나왔다. 사리함 속 금판에 새겨진 193자의 한자에 흥미로운 이름이 보인다.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백제의 왕비라는 대목이다. 사택왕비가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빈다는 내용을 새겼다. 그때가 639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번 석탑 복원에 들어간 비용은 국비 161억 원 포함, 230억 원이다. 요즘도 이런 거액이 들어가는데, 백제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왕실 차원의 시주가 없으면 불가능한 대역사다.

무왕 왕비는 신라 선화공주? 선덕여왕이 무왕의 처형?

석탑을 만든 639년은 무왕(재위 600∼641년) 시기다. 474년 서울의 한성백제가 붕괴한 뒤,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공주시대, 성왕(재위 523∼554년)의 부여시대를 거쳐 무왕은 익산에도 도읍에 필적할 만한 대규모 궁궐과 사찰을 짓는다.

‘삼국유사’에는 ‘서동’이라 불리던 무왕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년)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결혼하는 과정이 나온다. 경주로 간 무왕은 선화공주가 서동을 만나러 다닌다는 ‘서동요’, 요즘 말로 ‘가짜뉴스’를 퍼트린다. 신라왕실에서 불륜 혐의로 내쫓긴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와 결혼한다. 사실이라면 진평왕의 큰딸인 신라 선덕여왕은 무왕의 처형인 셈이다. 하지만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기록은 왕비가 백제 고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전한다. 선화공주와 사택왕비의 관계나 사실 진위는 풀어야 할 과제다.

미륵사지 석탑은 1층에 문, 실내가 있는 건물

사택왕비가 창건한 미륵사는 ‘3탑 사찰’이다. 절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정면 동서로 2개의 석탑, 가운데 목탑을 배치한 구조다. 이번에 복원된 탑은 미륵사지 서탑이다. 동탑은 훼손돼 사라졌는데, 근거도 없이 지난 1993년 ‘상상복원’됐다.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다. 미륵사지 서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국내 각지의 사찰에서 보는 석탑과 생김새가 다르다. 규모가 크다는 것 외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기단부가 있고 그 위 탑 1층에 문이 보인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란 거다. 이런 건물형태 탑을 찾아 신라 경주로 가보자.

분황사 모전석탑, 1층에 실내가 있는 건물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634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1층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이 나 있다. ⓒ 김문환

경주 구황동에 선덕여왕 시기 634년 창건한 분황사 터가 있다. 폐사된 지 오래지만,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이 남았다. 미륵사지 석탑처럼 기단 위 탑 본체 1층에 문이 나 있어 내부로 들어가는 구조다. 건물이다 보니 규모도 커서 3층으로 남은 지금 높이만 9m에 이른다. 분황사 탑은 또 하나의 특징을 갖는다. 짙은 회색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흙벽돌(塼, 전, Brick) 크기로 잘라 쌓았다. 돌로 흙벽돌을 모방(模倣)해 쌓은 석탑이라는 의미로 분황사 모전탑(模塼塔), 혹은 모전석탑이라고 부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역시 비슷하다. 몇 개의 큰 석재 덩어리를 쌓은 석탑이 아니다. 화강암을 자른 수천 개의 석재로 쌓아 모전석탑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분황사는 634년 창건됐지만, 탑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15년 일제가 해체, 수리할 때 사리함 속에서 뜻밖에 숭녕통보(崇寧通寶)가 발견됐다. 숭녕통보는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년) 연간에 쓰던 화폐다. 그러니 고려 숙종(재위 1095∼1105년)이나 예종(재위 1105∼1122년) 때 중건됐다는 얘기로 정확한 최초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절이 창건된 634년 이후로 추정할 뿐이다. 이제 불교와 그 문화를 전해준 나라들로 탑의 기원을 찾아 떠나 보자.

산동반도 사문탑(611년), 분황사 탑 닮은 모전탑

▲ 중국 신동사 사문탑. 611년 수나라 양제 때 만든 탑. 석재를 흙벽돌처럼 잘라 쌓은 건물형태 모전탑으로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양식이다. ⓒ 김문환

백제 또는 신라(6세기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뒤)가 중국과 소통하던 바닷길의 기착지, 산동(山東)성 성도 제남(濟南)으로 발길을 옮긴다. 제남 고속철도 역에서 택시를 타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바로 그 태산 방향으로 50분여 달리면 제남과 태산 중간지점에 신통사(神通寺)라는 절이 기다린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저족(티베트)의 전진(351∼394년) 시기 창건된 절이다. 사방 4개의 문이 설치된 사문탑(四門塔)이 반겨준다. 구조는 청석(靑石)이라는 돌을 흙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사문탑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그동안 중국에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선비족의 나라 동위(東魏) 시기인 544년 세워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72년 수나라 수양제 7년, 즉 611년에 건축됐다는 자료가 나왔다. 그러니까 미륵사지 석탑(639년)이나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이후)보다 앞선 시기다. 고구려를 침략했다 을지문덕에게 패퇴한 수 양제 시기 중국의 탑은 1층에 실내를 갖춘 건물 형태 모전석탑이었던 것이다.

하남성 숭악사탑(523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탑

▲ 중국 숭악사 전탑. 523년 선비족의 북위 효명제 때 만든 원추형 탑이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 형태 전탑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됐다. ⓒ 김문환

무대를 중국 하남(河南)성 낙양(洛陽)에서 버스로 2시간여 거리에 자리한 등봉(登封)의 숭산 소림사로 옮겨보자. 한때 국내 영화 팬들을 열광시키던 무술도 없고, 고색창연한 사찰 건물도 없는 소림사에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근처 20분여 거리 숭악사에 더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기다리니 말이다.

높이 36.8m의 거대한 탑이 소림사에 실망한 탐방객에게 위안을 준다. 형태는 사각형인 미륵사지 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신통사 사문탑(모전탑)과 달리 포물선의 원추형이다.

하지만 1층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건물구조는 같다. 1층 너비는 10.6m로 제법 넉넉하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진흙으로 만든 직사각형 벽돌로 만들어졌다. 전탑(塼塔)이다. 제남 신통사 사문탑, 경주 분황사 탑을 모전탑이라 부르는 이유는 흙벽돌을 모방해 만든 사각형 석재로 탑을 쌓았기 때문이다. 숭악사 전탑이 모델이란 얘기다. 숭악사 전탑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선비족의 나라로 불교 이상국가를 꿈꿨던 북위(北魏) 효명제 때인 523년 건축됐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탑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물선(원추형) 전탑이다.

간다라 파야즈 테페 반구형 전탑(2세기)

▲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간다라 파야즈 테페' 전탑. 2세기 불교를 진흥시켰던 쿠샨왕조 시기 흙벽돌로 쌓았다. ⓒ 김문환

발길을 BC 1세기∼AD 1세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불상을 만든 간다라 지방으로 돌린다. 우즈베키스탄 파야즈 테페(Fayaz Tepe)다. 수도 타슈켄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국경도시 테르미즈로 와 택시로 20분 거리다. 황량한 사찰 폐허에 새물내 물씬 풍기는 흰색 반구(半球)형 건물 하나가 경이롭게 솟았다. 기단부에 올라서면 아무다리야 강(과거 옥수스 강)과 그 건너 아프가니스탄 발흐 지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간다라 파야즈 테페의 이 흰색 반구형 건물은 일본 기술진이 만든 보호각이다. 내부로 들어가야 2세기 만들어진 간다라 탑이 원형대로 기다린다. 이 간다라 탑은 기존 탑의 이미지를 벗어난다. 사각형도, 원추형도 아니다. 지구본 같은 구형을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형태다. 중국과 한반도로 전래되기 전 간다라에서 탑은 구형이었다. 또 하나, 이 간다라 탑은 흙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간다라 탑들도 마찬가지다.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과 탑 건축 기술을 전수받은 선비족이 서양인 형상의 간다라 불상을 만들고, 반구형 전탑을 원추형 전탑으로 변형한 것이다.

인도-투파, 중국-탑파, 한국-탑… 전탑에서 석탑

불상과 달리 탑은 간다라보다 인도에서 먼저 생겼다. 인도 산치의 BC 2세기 탑 역시 둥근 건물형태 전탑이다. 부처님은 BC 6세기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열반한다. 제자들은 육신을 화장한 뒤 나온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탑을 만들었다. 탑의 기원이다. 이때부터 탑은 반구형 전탑이다.

인도의 고대 팔리어로 투파(Thupa),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라 불리는 탑. 중국으로 들어와 탑파(塔婆), 다시 한국으로 와 탑(塔)이란 말이 생겼다. 그 과정에 실물 탑은 인도와 간다라의 둥근 건물 형태 전탑에서 6세기 초 중국 선비족 북위의 원추형 건물 형태 전탑으로, 다시 7세기 초 한족 수나라의 사각형 건물 형태 모전탑으로 진화한다. 이 건물 형태 모전탑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들어와 미륵사지 석탑이나 분황사 모전석탑을 낳고, 이후 건축하기 쉬운 작은 석탑으로 축소된다. 그럼 목탑은? 다음 기회에 탐방해 본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임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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