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⑥ ‘의열단’

문 대통령, 의열단에 ‘헌주 한잔’ 언제쯤  

<앵커>

“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 2016년 개봉돼 큰 관심을 모았던 영화 <밀정>의 한 대목이죠.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투쟁을 다뤘는데요. 독립 가능성이 없다고 다수가 포기할 때 목숨 바쳐 맞서던 애국투사들의 이야깁니다. “정의의 일(事)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의 의열단. 3.1운동 뒤 1919년 11월 중국에서 결성된 ‘의열단’ 100주년을 맞아 그 피맺힌 절규의 활동상을 최유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영화는 독립군을 탄압하던 악질 일제 경찰 간부를 척살하는 의열단원의 투쟁을 묘사합니다. 의열단원의 투쟁을 단순히 미화하는 영화 속 허구가 아닙니다. 이곳은 서울 지하철 종각역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총독부 경찰의 심장부라 할 종로경찰서 자린데요.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이곳에 폭탄을 던져 경찰서에 피해를 줍니다. 김 의사는 폭탄의거 뒤 무려 10일간 도피하며 일경과 대치하다 끝내 자결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를 기념하는 작은 기념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거사를 치른 뒤 자결하는 의열단원은 또 있습니다. ‘경성부 황금정 2정목 195’ 지금은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가 폭탄을 던진 동양척식주식회사 옛텁니다. 이를 기념해 보시는 것처럼 나 의사 동상을 세웠습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제가 조선 농토를 빼앗아 농민을 착취하던 대표적인 침략 기관인데요. 이에 항거해 기관원들을 척살한 나석주 의사는 일제경찰에 대항하다 권총으로 자결 순국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표지석이 나 의사의 투쟁 행적을 알려줍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결성된 의열단원의 가열찬 투쟁은 수도 서울에서 김상옥 의사, 나석주 의사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암살을 시도한 김익상 의사, 부산경찰서에서 하시모토 서장을 척살한 박재혁 의사,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최수봉 의사까지 각지에서 투쟁을 펼칩니다. 사전 발각돼 실패한 거사계획까지 합하면 더욱 많습니다. 일제의 극렬한 체포 작전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투쟁이 끊이지 않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1923년 독립지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 그 속에 의열단의 강렬한 투쟁정신과 목표가 잘 묻어납니다.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한다” 의열단은 이를 실천할 대상으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침략기관 5곳을 ‘5파괴’로 정합니다. (5파괴 :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의 시설) 또 조선총독과 일본군 수뇌, 밀정 등 7부류를 ‘7가살’의 암살대상으로 꼽았습니다. (7가살 :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

인터뷰)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 

“우리 독립운동사에 나타나는 의열투쟁은 반드시 공격 대상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침략 책임자에 대한 공격, 그러니까 일본 천황부터 조선총독, 관동군 사령관, 또는 상해를 침략한 상해 주둔군 사령관 이처럼 침략 책임자에 대한 공격, 둘째는 침략 기관, 그러니까 총독부라든지 동양척식주식회사라든지 식산은이라든지 일본 통치기관에 대한 공격이다. 그래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민간인들을 공격한 일은 없다. 국민들 전체가 기가 죽어있을 때 소수 인력을 투입해서 일본의 타격을 주면서 국제적으로 한국 문제를 인식시키려 하고 국민들에게 의기를 일으키도록 하는 그 투쟁 방법이었다.” 

목숨 걸고 각지에서 투쟁한 의열단원들은 대부분 건국훈장을 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의열단을 만들어 단장으로 활동한 약산 김원봉은 받지 못했습니다. 남한에서 악질 친일파에게 받은 고문과 암살 위협을 피해 북으로 넘어간 게 이윱니다.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좌파 독버섯이 정통성을 갉아 먹는다”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는 시대착오적 역사 인식으로 물의를 일으킨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김원봉 서훈과 관련해 한 말입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독립운동 성과는 이렇듯 이념논쟁의 덫에 걸린 상탭니다.

인터뷰)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 

"조선의열단은 단순히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국내로 진입을 했다. 국내 진입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조선의열단이 나중에 조선의용군이 되고 조선의용대가 되면서 해방까지 이어졌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직이 조선의열단이다. 올해가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11월 10일이면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이 된다. 기념사업회 차원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행사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 3월 1일자 <폴리뉴스> 인터뷰 中)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자신의 SNS에 남긴 글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2년,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실천된 내용은 없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을 개정했지만, 김원봉은 빠졌습니다. 독립투사들의 가려진 활약상을 드러내 우리 독립운동사를 풍성하게 가꾸는 일. 의열단을 비롯해 독립투사들의 목숨 바친 투쟁 덕에 되찾은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의뭅니다. 단비뉴스 최유진입니다. 

(영상취재 : 최유진 / 편집 : 최유진 / 앵커 : 김유경)


편집 :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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