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⑤ 김원봉 서훈

‘빨갱이’ 낡은 틀 걷고 ‘치유와 평화’로

<앵커>

일제강점기 의열단과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 하지만, 해방 조국에서 친일파에게 고문을 당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다 월북하는데요. 남에서는 빨갱이로 북에서는 간첩으로 매도되며 양쪽 모두에서 버림받습니다. 최근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자는 서훈추서가 화두로 떠올랐는데요. 목숨 건 항일 독립투쟁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가족이 겪은 아픔도 치유하자는 취집니다. 나아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남북평화까지 그려보자는 겁니다. 김유경 기자의 보돕니다.

<리포트>

# 영화 ‘암살’ 중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영화에서 배우 조승우가 김원봉을 연기하며 던진 말. “밀양사람 김원봉” 김원봉이 고향 밀양에 자부심을 가진 만큼 밀양시민들도 김원봉을 기억해 줄까요?

# 독립지사들의 고장, 밀양

이곳은 밀양시 해천 테마거립니다. 김원봉을 비롯해 윤세주, 권잠술 등의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거리로 밀양시민은 물론 각지에서 온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 그 자체를 기억하고 존중하며 합당한 평가와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입니다.

인터뷰) 경남 밀양시 주민 김정순씨

"미모도 그렇고 젊음도 그렇고 모든 것이 아까운 인물이죠. (김원봉 선생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될지?) 해야죠. 당연하죠. 그 어린 나이에..."

#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독립투사

우리는 김원봉만이 아니라, 그의 부인도 기억해야 합니다. 밀양시에 있는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의 묘소인데요. 박차정은 항일 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학창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삽니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 때 투옥됐다 풀려나 뒤 1930년 중국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권유였습니다. 이때 김원봉을 만나 결혼한 뒤에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무장투쟁에 헌신합니다. 1939년 일본군과 전투도중 당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타국에서 생을 접습니다. 김원봉은 광복 후 아내의 유골을 안고 귀국해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했습니다. 정부는 1995년 박차정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하지만, 김원봉에 대해서는 국가에서나 밀양시에서나 특별한 조치가 없습니다.

인터뷰) 밀양시청 관계자

(김원봉 선생님에 대해서 따로 시에서 지원하거나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게 있을까요?) "저희 쪽에서는 따로 지원하고 있는 부분이 없다고 합니다."

# 혈육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아픔

부부 독립지사가 가족에게 남긴 유산은 인내하기 힘든 가혹한 아픔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김원봉 여동생의 아들인 외조카 김태영씨를 국제전화로 연결했습니다.

인터뷰) 김태영(김원봉 외조카/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

“그러니까 약산의 남동생이죠. 남동생 4명이 처형당했죠. 보도연맹 사건이라 그러는데... 거기서 밀양의 삼당지란 골짜기에 끌고 가서 총살을 시켰죠. 그 당시에 다른 또 외삼촌 세 분은 피신했고, 어머니도 잡혀가셨는데,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했죠. 그때가 어머니가 고등학교 경남여고 다닐 땐데. 살아남은 외삼촌 한 분이 4.19 이후에 장면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에 그 유골을 수습을 했어요. 밀양에 약 500명 정도가 돌아가셨는데 처형을 당했는데 그 중에 우리 큰아버지도 계시고 굉장히 의로운 분들도 많았겠죠. 약산의 사촌들도 있었고. 약산에 관련된 분은 9명 정도가 처형을 당했죠. 그러니까 처형이라고 얘기하는 거보다 학살이죠.”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인터뷰) 김태영(김원봉 외조카)

“이승만이가 물러나고 난 다음에 수습을 했는데. 유골을 따로 이렇게 머리 부분은 머리 부분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모아서 선산에 크게 묘를 만들어서 모셨어요. 모셨는데, 5.16이 일어나서 박정희가 쿠데타를 정권을 잡아서 이쪽에 군이 내려와서 그 무덤을 다 파헤쳐갖고 불태우려고 유골을 다 갖고 갔어요. 그 비석도 다 부숴버리고. 그러니까 두 번 죽였죠. 그죠? 그랬어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죠.”

살아남은 가족도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터뷰) 김태영(김원봉 외조카)

“우리 사촌형은 사법고시 그 당시에 그때는 형도 왜 그렇게 사법고시에 매달렸는지 몰라... 안 되는 거 뻔하게 아는데. 합격을 했는데도 신원조회에서 연좌제 때문에 떨어졌죠. 그런 아픔이 있으니까 다들 나이 들어서 안 나타나려고 그랬죠. 그리고 다들 가난하게 못 살았고.”

이념을 도구로 낙인을 찍고 굴레를 덧씌우는 과거에서 탈피해, 서훈으로 치유와 평화의 길을 내놓습니다.

인터뷰) 김태영(김원봉 외조카)

"서훈 얘기만 꺼내면 빨갱이니 쓸데없는 말을... 대한민국에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수도 없이 많은데, 지금 그런 사람들한테 또 다시 큰 상처를 입히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그게 유족을 위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또 우리가 평화를... 남북한의 평화를 얘기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가장 큰 이슈인데... 서훈을 함으로 해서 그게 좀 상징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요. 대한민국 많은 분들 독립운동하신 분들이 서훈을 못 받고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억울한 분들이 굉장히 많은데. 약산 선생님을 서훈을 주면 그런 억울한 분들에게는 어떤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좀 희망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죠."

# 분열의 시대 넘어 화합으로

김원봉은 민족 통합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힘을 모았습니다. 백범 김구가 주도하던 임시정부에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참여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과 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상황입니다. 지난 1일 독립기념관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요.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라는 주제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주대 이헌환 교수가 한 발언이 미래지향적인 돌파구를 열어줍니다.

“남한 정부가 과감하게 월북 독립운동가들에 상훈 보훈을 개방하면 통일 대한민국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단비뉴스 김유경입니다.

(영상취재 : 김유경, 윤종훈 / 편집 : 김유경, 최유진 / 앵커 : 강도림)


편집 : 임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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