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페미니즘’

▲ 임지윤 기자

'응 여자는? 잘 주는 애들로.’ 참 부끄럽다. 남자라서 면목이 안 선다. 나 또한 이런 표현에 물들어 있었기에 더 고개를 떨군다.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 직원들에게 이 말을 했던 인기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는 ‘잘 노는 애들’을 잘못 입력한 것이라고 손사래 쳤다. 하지만, 눈치 빠른 대중은 안다. 이들의 ‘give and take’에 ‘성’과 ‘돈’이 내포돼 있다는 것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다시 부끄럽다.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치부하기에 여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굴레가 너무 버겁다. 장손으로 집안 사랑을 독차지한 내가 7공주집 막내딸, 박열이 씨 아들이란 점은 아이러니다. 집안 어른과 동네 사람들의 ‘아들 대망’을 뒤로한 채 태어난 어머니의 삶은 탄생 순간 희망 대신 절망을 다시 잉태했다. 우리는 모른다, 사랑받는 나를 있게 해준 어머니들이 져야 했던 태생적 멍에를.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고발했던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의 열악한 풍조는 ‘동백꽃’으로 알려진 소설가 김유정의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낙비’에 잘 드러난다. 흉작과 빚쟁이의 위협에 야반도주한 남편 춘호는 노름판에 뛰어든다. 밑천 2원이 필요해진 춘호는 아내를 때리며 돈을 구해오라고 내쫓는다. 마을 부자 ‘이주사’에게 몸을 맡기고 2원을 얻어오는 춘호 아내의 삶에 폭력이란 권력에 순응해 자신의 정체성을 팔던 ‘여인’의 처절함이 묻어난다. ‘춘호’는 아내를 매춘으로 내몬 ‘어금니 아빠’의 83년 전 복선(伏線)이었다. 지난해 봇물을 이룬 사회 각 분야 미투,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 속 대한민국 여인들의 자화상은 ‘소낙비’ 속 춘호 아내 이미지에 비극적으로 겹친다.

▲ 정씨는 지난 2015~2016년 사이 상대방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성관계 동영상이나 사진 등을 가수 승리(29·본명 이승현) 등이 참여한 카카오 톡 단체 대화방 등을 통해 지인들에게 공유한 혐의로 지난 16일 구속 기소됐다. ⓒ BBC 코리아

역사적으로 여성이 처음부터 약자는 아니었다. 신석기 농사 문명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인 터키 차탈회윅에서 출토된 비너스 상의 풍만한 몸은 ‘섹슈얼리티’와 거리가 멀다.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지모신(地母神)의 ‘건강함’을 담았다. 울산 신암리에서 대서양 연안 프랑스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금속이라는 생산수단의 등장으로 빚어진 계급사회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의 종속물로 곤두박질친다. 프랑스 여성해방운동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 <제2의 성>(Le deuxieme Sexe)에서 이런 종속적 삶을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 7공주 집 막내딸인 어머니는 태어나는 순간 ‘인간’의 존귀함이 아닌 ‘여성’의 속박과 차별 속에 내던져진 거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게 태어났을 뿐 우열은 없다. 남성이 누려왔던 ‘장손’ 같은 알량한 기득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어두자. 그래야만 여성이 겪는 ‘7공주 집 막내딸’의 아픔이 진정으로 가슴에 들어온다. 페미니즘의 여성인권운동을 여남의 갈등이 아닌 ‘성 평등’ 속의 조화로 승화하자는 결기 속에 보부아르의 지적을 되새긴다.

‘주어진 현실 세계를 자유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이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양안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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