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무상교육’

20**년 봄의 가상현실

▲ 유연지 PD

‘3박4일 제주도 수학여행 참가비 41만3천원. 다음주 수요일까지 납부할 것.’ 수학여행 참가 통지문이었다. 일주일하고도 하루 남았다. 이번에도 ‘불참’에 표시하려 했는데 ‘담임샘’이 나를 포함해 지영, 민수, 슬기를 교무실로 부른다. 왜 부르는지는 딱 보면 알겠다. 반에서 제일 꼬질꼬질한, 수학여행 갈 돈이 없을 것 같은 우리 반 '불참 어벤져스'다. 어딜 가든 불참에 표시하는 게 익숙한 우리 넷은 터덜터덜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서 들은 말은 뜻밖에도 내가 ‘수학여행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 3만5천원은 내야 한다고 했다. ‘1인당 수학여행비로 37만 8천 원까지는 지원이 나오니까 나머지 금액만 내면 된다’는 거다. 올해부터 정부가 저소득층을 위해 시행하는 사업이래나? 3만5천원... 기초생활수급자인 슬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나머지는 3만5천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다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가 누워있다. 매일 폐지 주우러 다니시더니 앓아 누우신 모양이다. 귀가한 엄마한테 말을 걸었다. "엄마, 나 3만2천원만." 최대한 엄마 형편을 생각해 한 말이다, 틈틈이 모아온 돈 3천원은 빼고 말했으니까. 결과는 참담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에게 ‘예상외 지출’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예상에 없던 지출이 있는 날엔 할머니나 엄마가 한두 끼를 걸러야 한다. 할머니는 그냥 몸살이 아니었나 보다. 기관지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이건 명백한 예상외 지출이다. 엄마는 나에게 ‘3만2천원’을 줄 수 없다.

이번 수학여행도 못 간다고 생각하며 발을 구르던 그때, 집 앞에 세워진 할머니 '리어카'가 생각났다. ‘그래, 일주일에 3만2천원, 까짓거 나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일어나서 학교에 가기 전 동네 폐지와 병을 주웠다. 폐지가 1kg에 80원, 맥주병은 하나에 130원, 소주병은 100원이다. 오늘 실적은 폐지 30kg, 맥주병 20개, 소주병 24개다. 총 7400원 벌었다. 이대로만 하면 5일이면 3만2천 원을 거뜬히 모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가기 전 무리해서인지 다음날 아침에는 동네를 돌지 못했다. 그 다음날은 5000원 벌었다. 남은 기한은 나흘, 고물상까지 매일 가는 건 무리여서 폐지와 병을 집에 쌓아두고 마지막 날 하교 후 한꺼번에 팔자는 생각을 했다.

▲ 서울시 교육청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수학여행비를 40만원 내로 지원하고 있다. ⓒ pixabay

오늘이 폐지와 병 줍는 마지막 날이다. 나흘간 다른 일은 전혀 못 하고 폐지와 병만 주웠다. 배가 고파도 수학여행을 생각하며 급식에 나온 요구르트와 빵을 아껴 먹기도 했다. 내 계산으로 집에 쌓아둔 걸 팔면 3만2천원은 거뜬히 넘기고 영화도 한 편 볼 수 있다. 반 친구들이 매일 얘기하는 '극한직업'을 나도 보고 싶었다. 보고 나서 같이 웃고 싶었다. 영화 볼 생각을 하니 자연히 노래가 나온다. 어릴 적 폐지를 줍는 할머니 옆을 따라다닌 적이 있다. 폐지가 많이 모인 날 할머니는 고물상으로 가는 길에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 나 역시 기분이 좋다. 할머니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다. 얼른 영화관에 갔다가 고물상으로 가야겠다. 1년 만에 가는 영화관이라 기대가 컸다.

영화가 끝나고 서둘러 폐지를 싣고 고물상으로 갔다. 계산대로라면 3만원 정도. 처음 벌었던 만2천4백원을 합하면 4만2천4백원, 영화 한 편 봤으니 3만2천4백원, 딱 맞다.

"이걸 어쩌지? 그저께부터 폐지 값이 내렸어. 이제 폐지를 해외에 수출 못 한대. 1kg당 50원 쳐 줄게. 이것도 사정 봐준 거야."

병과 폐지를 모두 내어주고 내가 받은 돈은 3만 원이 아니라 1만8천2백 원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 1만2천 원이 모자란다. 아까 즐겁게 부른 할머니 노래가 귓가에 슬프게 들렸다. 일주일하고도 하루 동안 나는 200kg이 넘는 폐지를 주웠고, 200개 가량 병을 모았으며, 40시간 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고작 영화 한 편을 봤다, 1년 만에 간 영화관에서. 나는 이번 수학여행도 ‘불참’이다.

2019년 봄의 현실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둘러싸고 여야가 또 격돌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내년 총선용 선심이 아니냐고 들이댄다. 고교무상교육은 사실 박근혜 정부 때도 국정과제로 추진했던 정책이다. 소요되는 예산 총액이 적지는 않지만 수혜자가 너무나 많으니 보편복지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옳다. 학생 개인에게 지급되는 돈은 나라에는 푼돈 수준이다. 유럽 복지국가들은 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도 무상교육을 하는 데가 많다. 우리 고등학생들의 꿈이 정쟁으로 무산되지 않기를....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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