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② 우사의 역사 현장

독립투쟁 평생유랑, 언제 고이 머물까

<앵커>

(김유경)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은 일제가 강제 점령한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셨는데요. 그중에서도 파리, 상하이, 모스크바와 워싱턴… 지구촌 구석구석을 마다하지 않고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며 민족해방을 외친 분이 계시죠.   

(임지윤) 네.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를 비롯해 8개 국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어학 능력으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지사. 김유경 기자! 어느 분이죠?

(김유경) 네. “일본의 속박 아래 떨고 있는 2천만 영혼의 간청에도 모른 척한다”며 입으로만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던 서구 열강을 향해 울분을 토하던 우사 김규식 박삽니다.

(임지윤)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또 부주석으로 독립외길을 걷던 김규식 박사는 1945년 귀국한 뒤, 이번에는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투쟁을 전개했지요.

(김유경) 네. 1948년 백범 김구와 직접 평양을 찾아 김일성과 만나며 펼치던 남북 협상입니다.

(임지윤) 김유경 기자! 이렇게 독립운동과 남북협상을 전개하던 김규식 박사의 발자취가 국내에 남아 있죠?

(김유경) 네. 그렇습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삼청장인데요. 지금은 건물은 사라진 채 터만 남은 삼청장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임지윤) [TV 독립열전], 오늘은 두 번째로 우사 김규식 박사의 독립운동 여정과 삼청장 복원 문제를 최유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 100년 전 프랑스 기자가 본 김규식의 울분

1919년 8월 8일 자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La Lanterne). “4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에 독립국가로 있었지만, 지금은 일본의 끔찍한 속박 아래 고개 숙인 2천만 영혼의 요청에도 무관심한, 정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에 그는 경악했다” (cette indifférence, et il s'étonne que la France, éprise d'idéal et de justice, ne réponde pas avec plus d'empressement aux implorations de ce peuple de 20 millions d'âmes, couché aujourd'hui, après une existence nationale indépendante et exemplaire de plus de 4.000 années, sous le joug pesant du Japon) 김규식 박사의 프랑스 고별 연설을 매우 격정적이었다고 평했습니다. 프랑스 외무부 관리가 있었다면 김규식에게 멱살을 잡혔을 것이라고 보도 했습니다.

100년 전, 김규식 박사가 도착했던 프랑스 파리 지돕니다. 베르사유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김규식 박사는 ‘독립공고서’(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를 제출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일본의 방해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외면뿐이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도 1차 대전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은 예외로 뒀습니다. 결국 독립 청원외교에 실패한 그는, 미국으로 가 워싱턴 정가에 한국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 남북협상의 산실, 삼청장

이곳은 종로구 삼청동 145-20번지 삼청장 옛텁니다. 1945년 11월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입국한 김규식 박사가 살던 곳인데요.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김규식 박사에게 내준 집입니다. 백범 김구의 경교장에 견줄 수 있는데요. 김규식 박사는 1948년 초 이곳에서 백범 김구와 손잡고 역사적인 남북협상에 나섭니다.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 독립운동 정신을 통일운동으로 되살렸습니다. 남북협상을 추진하던 그의 철학은 김일성과 연안파 김두봉에게 보낸 서한에 잘 담겨있습니다.

# 주민도 모르는 삼청장 터, 청와대가 출입통제

현재 삼청장 터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통제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경호실이 소유한 땅으로, 안전가옥 일명 ‘안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네 주민들도 삼청장의 역사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터뷰) 서울 삼청동 주민 이세교(73) 씨

“삼청장은요, 잘 몰라요. 들어보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고. 내가 여기 산지가 꽤 오래 됐어요. 한 40년 됐어요. (그런데 삼청장을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네, 거기가 뭐하는 곳이에요?”

현장으로 가려면 경호실 직원들이 막아섭니다.

인터뷰) 청와대 경호실 직원

(여기가 삼청장인데 가볼 수 없어요?) “일반인은 여기 못 들어가세요.”  

# 삼청장 복원, 민족과 통일교육 장 활용해야

김규식 박사는 1945년 11월 환국한 뒤 삼청장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5년 만인 1950년 6.25가 터지면서 납북돼 삼청장을 떠납니다. 1950년 12월 압록강변에서 숨진 김규식 박사는 북한의 애국열사묘역에 안장됐습니다. 그의 손녀 김수옥 우사김규식연구회 회장은 할아버지의 묘소 이장과 함께 정부 차원의 삼청장 복원을 소망합니다.

인터뷰) 김수옥 우사김규식연구회 회장

“김구의 경교장,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 이 세 곳이 모든 정무를 봤던 곳이잖아요. 세 군데 중에서 저희 할아버지 삼청장만 지금 복원도 안 돼 있고 역사적인 건물로 사용이 안 되니까 삼청장은 문화재청이나 청와대에서 역사적인 건물로 지정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일파의 재산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사유지로, 다시 대통령 경호실 부지로... 가까이 있어도 멀게 만 느껴지는 역사 현장. 김규식의 삼청장이 앞으로 민족교육과 통일교육의 장으로 복원될 수 있을지. 평생 조국 위해 몸 바친 김규식은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되돌아볼 땝니다. 단비뉴스 최유진입니다.

(영상취재, 편집 : 최유진 / 앵커 : 김유경, 임지윤)


편집 : 오수진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