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편의점 인간, 편의점 사회

▲ 김지연 PD

세계 최초 편의점은 ‘세븐일레븐’이다. 저녁 7시부터 밤11시까지,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는 밤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는 가게라는 의미였다. 이제는 아예 24시간 체제다. 편의점의 탄생은 ‘저녁부터 밤’ 사이에도 생필품과 식료품을 사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극심해진 경쟁과 줄어든 임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까지 임금노동에 뛰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하는 주체’에서 ‘노동을 위한 인간’으로 내몰렸다. ‘워라밸’, ‘저녁이 있는 삶’ 같은 신조어가 비인간적 삶의 질을 반증한다.

노동시간이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불편을 경험하게 됐다. 노동에만 쏠린 생활을 하다 보니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이 없어서 생긴 불편이다. 편의점이 제공하는 ‘편의’가 특별한 게 아니라 요리와 같은 일상적 가사노동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게 고작이다. 이런 불편을 부담해왔던 공동체도 개인화가 진전되면서 붕괴됐다. ‘가족’, 그중에서도 가사노동을 전담했던 어머니의 부재로 재생산 노동의 공백은 더욱 가속화했다. 장시간 노동과 가족의 해체라는 신자유주의 결과물들이 만든 ‘불편함’들이 편의점이 성공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심화가 만든 이런 불편을 우리는 편의점을 통해 '소비'라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는 점은 역설적이다.

▲ 편의점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인간이 아니라, 거래 행위를 작동하는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 flickr

편의점이 제공하는 편의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한 편의다. 편의점은 태생적으로 인간성을 배제한다. 전통시장, 골목시장, 동네시장 같은 공동체 기반의 가게들과 달리 편의점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는 어떤 교류나 관심도 없다. 물건에 담긴 맥락들은 단순한 바코드로 치환되었다. 오히려 이런 맥락들을 유통의 불편으로 정의하고 제거한 덕분에 편의점은 ‘불필요한 대화’ 없이 빠른 속도로 계산만 하면 되는 단순 인력을 최저임금으로 고용해 24시간 영업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인간이 아니라, 거래 행위를 작동하는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편의점에는 사람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이 깔려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 번쯤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 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 사러 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 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은 불편함을 상품화해 제공함으로써 그 이면에 담겨있는 문제들을 은폐한다. 사람들이 요리도 설거지도 할 필요가 없는 ‘편의점 도시락’을 선택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현실 때문이다. 이제는 인기 베이커리의 디저트와 수제 맥주 등 다양한 취향을 고려한 상품도 출시하고 있다. 개성과 취향까지 편의의 대상이, 소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그 취향을, 개성을 발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돈의 부재에서 오는 ‘불편’은 은폐된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불편한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유지해준다는 점에서 ‘현상 유지’다. 편의점은 신자유주의 덕분에 생겨났지만, 이제는 편의점 덕분에 신자유주의가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신종 도시 인프라로서, 개인화된 경제 주체의 이동성과 유목성 증대에 기민하게 기여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부응하는 소비주의 인간을 양산하는 데도 편의점은 일등 공신이다. 편의점에 의해 신자유주의적 의식과 일상이 알게 모르게 육화되고 있다.’ (전상인, ‘편의점 사회학’)

편의점 ‘만능’에 이른 한국 사회는 우리의 삶이 더욱 비인간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주소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더 다양한 편의점이 아니다. 소비를 통해 불편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편리한 방식이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는 이롭지 않다. 오히려 노동자의 생존을 간편하게 충족함으로써 빠르게 일터로 복귀시키고 더 오랜 시간 노동을 시키려는 자본의 편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지금도 꿈틀거리는 그 투명한 유리상자를 생각한다. 가게는 청결한 수조 안에서 지금도 기계장치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 광경을 생각하고 있으면 가게 안쪽의 소리가 고막 안쪽에 되살아나 다시 잠들 수 있다.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우리에게는 빠르고 간편한 소비가 아니라, 복잡하고 불편한 소비가 필요하다. 폭등한 가격 때문에 살까 말까 망설인 시금치에는 농민의 피땀이 담겨 있고, 큰 맘 먹고 산 자동차에는 같은 바퀴를 달아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노동자의 눈물이 담겨있다. 생일 케이크를 들었다 내려놓는 행동에는 맞벌이 여성의 고뇌와 결혼을 포기한 청년의 우울함이 녹아있다.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서로가 갖고 있는 맥락들을 공유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사회의 문제들을 뒤돌아봐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하게 ‘인간소외’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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