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양당제’

▲ 나혜인 기자

노예제 폐지를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13조는 ‘가장 순수한 사람이 가장 부정한 방법으로 통과시킨 법안’으로 불린다. 1863년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남북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으로 노예제를 보장하는 기존 헌법 가치를 잠시 정지시킨 것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어떻게든 헌법에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하고 싶었던 링컨은 야당을 설득하기 위해 매수, 강요, 속임수 등 온갖 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명제에 비추면 링컨 사례는 특수하다. 하지만 링컨은 ‘승자독식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 정치 환경에서 ‘노예 해방’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소 불의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201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에서 보듯 의회에서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키려던 링컨의 몸부림은 다수 의석을 점한 정치세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공고한 양당제가 얼마나 제도개혁을 더디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지향·학력 등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차별과 혐오, 이를 둘러싼 갈등 역시 승자독식의 정치문화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해결하기 어렵다. 차별과 혐오를 뿌리 뽑는 일은 결국 기득권과 싸우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구별 짓고 배제하거나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혐오하는 짓은 모두 남성·어른·내국인·비장애인·보수개신교·이성애자·고학력자 등 기득권층이 한다. ‘지금 상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기득권층을 흔들려면 강한 정치가 필요하지만, 약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구조는 정치권에 개혁에 나설 유인을 제공하지 못한다.

▲ 57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정치개혁공동행동은 지난 1월 28일부터 31일까지 국회 앞에서 '72시간 비상행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자유한국당, 더불어민주당 두 거대 정당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의 참정권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에 나서길 촉구했다. ⓒ 참여연대

국회에서 10년 넘게 표류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만 봐도 보수 야당의 반대가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여당 역시 동성애 옹호 등 기득권이 만드는 논란에 맞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18대 대선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지만 19대 때는 한발 물러섰다. 선거운동기간 TV토론에서는 대놓고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해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가장 적극적인 정의당 등 진보정당은 지금 의석 기준으로 그리 비중 있는 국정 파트너가 아니다. 정치권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차별과 혐오에 침묵하고 기득권 편에 선다면 사회 갈등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차별 해소’라는 사회 과제를 내버려 둔다고 정치인을 비난하는 건 쉽다. 하지만 진짜 개혁을 이루려면 정치권이 차별받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유인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 먼저다. 선거제도 개혁이 첫걸음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다당제를 안착시켜 소수정당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다당제와 연립정부가 보편화한 유럽에서는 다수당이 소수당의 정책을 받지 않으면 국정을 제대로 끌고 나갈 수 없다. 독일에서 보수당 출신인 메르켈이 탈원전 정책을 받아들인 것도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등 진보 성향 연정 파트너들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에서도 극우정당 등 소수자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세력이 뜨고 있지만, 다양한 민의를 폭넓게 반영하는 유럽의 정치제도는 이들을 견제하고 인간의 존엄성, 평등, 민주주의 등 보편타당한 가치를 지켜낼 힘이 있다. 트럼프가 흔들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와 비교하면 승자독식 정치제도의 한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이다. 원래 이기적 존재인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건 선의가 아니라 정교한 제도다. 사회 전반에서 다수 기득권의 횡포 속에 묵인되는 차별과 혐오를 없애려면 이를 방관하는 다수 정당의 횡포부터 막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링컨 같은 정치가가 없다고 하소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글쓴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10기이며 올 2월 YTN 기자로 입사하기 직전에 이 글을 제출했습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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