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㉙ 금관문화1

“산 위에 저게 뭐꼬?” 경상북도 고령군청에서 동북쪽 교외로 빠지면 지산동 대가야 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 뒤로 고령군 대가야읍(2015년 이전 고령읍)과 낙동강 지류(대가천, 소가천, 회천)를 굽어보는 해발 311m 주산(主山) 능선이 보인다. 산정상부 능선을 거대한 봉분들이 가득 메운다. 유라시아 대륙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야만의 가파른 능선 고분군이다. 1501년 안동 출신의 퇴계 이황과 동갑나기로 함께 동인의 영수로 추앙받던 합천 출신 남명 조식이 육순을 맞아 1560년경 주산 능선의 대가야 고분군을 보고 놀라 던진 말이다.

“산 위에 저게 뭐꼬?” 5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찾는 누구라도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가야 고유의 문화유산에 새삼 놀란다. 능선 고분 가운데 32호 묘에서 1978년 금동관이 나왔다. 동판을 두드려 펴 모양을 만들고 금을 도금한 5세기 가야 금동관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다. 문화재청은 출토 40년만인 지난 12월 19일 지산동 32호묘 금동관을 보물의 반열에 올렸다. 이 금동관은 누가 쓰던 것일까? 대가야의 왕이나 왕비? 실제 쓴 것인지, 무덤 부장품으로 넣은 장식품인지... 우리민족은 물론 유라시아 대륙 금관, 금동관의 비밀을 상·하 2회로 나눠 풀어본다.

▲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뒤 주산 능선의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 김문환

황남대총 왕비릉에서 나온 금관이 말하는 것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전시실로 가보자.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유물은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에서 출토한 국보 191호 금관이다. 황남대총은 만주에서 남해안까지 한국인이 남긴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봉분이 둘인 쌍분(雙墳)으로 길이만 120m에 이른다. 북쪽 봉분은 부인대(婦人帶)라는 글씨가 적힌 은장식 허리띠가 출토된 점으로 미뤄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남쪽 봉분은 60대 남성 유골이 나온 점으로 미뤄 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15살 안팎의 젊은 여자 순장 유골도 같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전시실을 대표하는 황남대총 금관은 왕의 능인 남분(南墳)과 왕비의 능인 북분(北墳) 가운데 어디서 나왔을까? 금관을 왕의 상징으로 여겨 당연히 남분에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금관은 북분에서 나왔다. 남분에서는 격이 낮은 금동관이 출토됐다. 금관이 왕권의 상징이 아니라는 의문을 품고 탐방을 이어간다.

▲ 황남대총. 경주 대릉원. ⓒ 김문환
▲ 황남대총 북분 금관. ‘출(出)’자 형태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세움 장식으로 관테(대륜) 위에 붙였다. 국립중앙박물관. ⓒ 김문환

1973년 8월 출토된 황남대총 금관의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높이는 27.5㎝다. 금관의 무게는 1kg이니 소고기 두 근 가깝다. 머리에 쓰는 관의 테두리, 즉 원형 대륜(臺輪) 위로 조형물을 붙였는데 두 종류다. 하나는 얼핏 한자 날 ‘출(出)’자에 ‘산(山)’자가 하나 더 붙은 형태의 나뭇가지(樹枝, 수지)다. 초화(草花)형이라 부른다. 이런 나뭇가지 3개 사이로 산과 초원에서 뛰노는 사슴 뿔(鹿角)장식 2개가 세워졌다. 초원의 상징, 나뭇가지와 사슴뿔 이라는 모티프를 잘 기억하고 무대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자.

천마총 금관이 황남대총 금관보다 화려

1973년은 우리 고고학사를 풍성하게 채운 해다. 황남대총에 한 달 앞서 1973년 7월 황남대총 맞은 편 천마총에서도 금관이 출토됐으니 말이다. 국보 188호인 천마총 금관은 높이 32.5cm, 지름 20cm로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크다. 장식은 황남대총 북분과 같다. ‘출(出)’자형 나뭇가지 장식 3개에다 사슴뿔 2개다. 황남대총북분 금관과 차이점은 나뭇가지 장식 ‘출(出)’자의 ‘山’ 형태가 4단으로 3단인 황남대총보다 많다. 여기에 금달개와 비취로 만든 곱은옥을 무수히 달아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워 가장 후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황남대총과 천마총 말고 금관이 더 있을까?

신라 금관, 중앙박물관 2개, 경주박물관 4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금관총 금관이다. 1921년 일제의 손으로 발굴됐다.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고 해서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길이 27cm인 금관총 금관 역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북분 금관처럼 ‘출(出)’자형 나뭇가지 장식 3개에다 사슴뿔 2개를 세움 장식으로 달았다. ‘출(出)’자는 3단이다. 금으로 만든 방울(鈴)이 출토됐다고 해서 금령총(金鈴塚)이라 불리는 금령총 금관 역시 1924년 일제 손으로 발굴됐다. 금관총에서 금관을 최초로 출토한 지 3년만이다. 금령총 금관도 ‘출(出)’자 나뭇가지 장식 3개와 사슴뿔 2개를 원형 테인 대륜에 달았다. 금령총 금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전시하지는 않아 일반 탐방객이 볼 수는 없다.

▲ 천마총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처럼 ‘출(出)’ 형태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세움 장식으로 대륜 위에 붙였다. 국립경주박물관. ⓒ 김문환
▲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 김문환
▲ 서봉총 금관. 복제품. 부산 복천박물관. ⓒ 김문환

보물 339호 서봉총 금관은 금령총 금관 발굴 2년 뒤 1926년 일제가 발굴했다. 이때 스웨덴(瑞典) 황태자가 방문한 길에 발굴에 참여했는데, 금관에 봉황(鳳凰) 추정 새장식이 달려 있어, 스웨덴+봉황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서봉총(瑞鳳塚)이라 무덤 이름을 지었다. 서봉총 금관 역시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데 전시하지는 않아 실물을 볼 수 없다. 부산 복천박물관에 복제품을 전시해 서봉총 금관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형태는 ‘출(出)’자형 나뭇가지 장식 3개에다 사슴뿔 2개로 신라 금관의 일반적 유형을 따랐다. 금관 높이는 30.7㎝, 지름 18.4㎝, 드리개 길이는 24.7㎝다.

작아서 머리에 쓸 수 없는 교동·금령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에는 금관 하나를 더 전시하고 있다. 교동 금관. 경주시 교동(校洞)의 한 고분에서 도굴한 금관을 압수한 유물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6개 중 형태가 가장 단순하다. 소박한 나뭇가지 장식만 있을 뿐 ‘출(出)’자도 사슴뿔 장식도 없다. 교동금관은 지름이 14cm에 불과해 실제 쓰는 용도가 아니라 장식용 부장품이었음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아이를 위해 만든 금관이라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금령총 금관 역시 지름이 16.5㎝로 성인이 쓸 수 없어 6개 신라 금관 중 2개가 소년용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천마총 금관처럼 머리에 쓴 채 발굴되기도 하지만, 교동이나 금령총 금관처럼 머리에 쓸 수 없이 부장품으로 만든 금관도 있었다는 해석이 합리적이다.

▲ 교동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 김문환

‘출(出)’자 금동관, 왕이 쓰는 게 아니다

프랑스 빠리 기메(Guimet)박물관으로 가보자. 루브르는 세계 각지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경계는 지중해에서 이란까지다. 고대 페르시아 유물까지 루브르에 소장하고 이란 동쪽에 붙은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 간다라 유물과 인도, 동아시아 유물은 기메 박물관에 전시한다. 기메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유물에는 금동관도 포함된다. 3단 ‘출(出)’자와 사슴뿔 세움 장식을 단 전형적인 신라 금동관이다. 프랑스 기메박물관 금동관 외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출(出)’자와 사슴 뿔 장식 금동관을 만난다. 금관은 신라 수도 경주에서만 발굴됐지만, 금동관은 다르다. 경주를 벗어나 각지에서 출토된다. 국립대구박물관에는 대구에서 발굴된 금동관 3점이 기다린다. 대구 문산리에서 출토한 금관은 3단 ‘출(出)’자 형태다. 대구 달성고분 37호분에서 나온 두 금동관 역시 3단 ‘출(出)’자 형태지만, 보존 상태가 훨씬 좋다. 1점은 사슴뿔 세움 장식도 달렸다.

▲ 3단 ‘출(出)’자 금동관. 신라. 빠리 기메박물관. ⓒ 김문환

대구에서 북으로 좀 더 올라가 보자. 강원도 해안을 따라 신라의 문화가 퍼졌던 동해 북평과 강릉 초당동 출토 3단 ‘출(出)’자 형 금동관이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런 3단 ‘출(出)’자 형 금동관은 경주에서 동해안을 타고 남으로 내려가 부산 복천동 복천 1호 고분에서도 나왔다. 가야 지역으로도 전파됐다는 의미다. 역시 가야 지역인 경상남도 합천 옥전동 M5호 고분에서도 3단 ‘출(出)’자 형 금동관이 출토돼 가야도 신라의 영향을 받아 금관을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충북 단양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기다린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는 것은 금관이나 금동관이 꼭 왕이 쓰는 왕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왕실 일원, 귀족, 지방의 유력한 세력가 모두 금관이나 금동관을 사용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황남대총 남분 왕의 봉분에서 금동관이 나왔으니 왕이라고 꼭 순금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이 대목은 2편 유라시아 대륙 금관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 3단 ‘출(出)’자 금동관. 신라. 달성고분 출토. 국립대구박물관. ⓒ 김문환
▲ 3단 ‘출(出)’자 금동관. 신라. 충북 단양 출토. 국립청주박물관. ⓒ 김문환
▲ 3단 ‘출(出)’자 금동관. 가야. 합천 옥전동 출토. 복제품. 합천박물관. ⓒ 김문환

가야 금관은 도굴돼 도쿄박물관과 리움박물관 소장

무대를 일본 도쿄박물관 동양관실로 옮겨보자. 일제시대 한국 내 문화유산을 대거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 기업가 오쿠라의 사실상 약탈품 가운데 하나인 가야 금관이 전시돼 있다. ‘출(出)’자형 가지나 사슴뿔 같은 세움 장식, 현란한 달개와 비취 곱은옥이 매달린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특별한 장식 없이 풀잎이 양쪽으로 퍼진 형태의 초화(草花)형 세움 장식 2개가 있고, 그 사이에 말띠 꾸미개처럼 생긴 세움 장식이 하나 더 붙었다. 말띠꾸미개 형태 세움 장식에는 나뭇잎처럼 생긴 금달개 8개가 작은 고리로 매달렸다. 금관 지름이 16.9cm로 작다. 성인이 쓸 수 없는 크기다. 신라 교동 금관이나 금령총 금관과 마찬가지다. 부장품이지 머리에 실제 착용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 가야 금관. 도쿄박물관 동양관실. ⓒ 김문환
▲ 가야 금관. 복제품. 고령 대가야박물관. 진품은 리움박물관 소장. ⓒ 김문환

가야 금관을 용인 에버랜드 리움(LEEUM, 옛 호암미술관) 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국보 138호인 리움 소장 금관 역시 신라 금관과 비교하면 소박한 형태다. 높이 11.5㎝, 지름 20.7㎝로 비교적 작다. 높이와 지름에 비해 원형 관테는 세로 폭이 3.6㎝로 꽤 넓다. 관테에는 작은 원 형태의 금달개와 비취 곱은옥을 매달았다. 또 관테에 4개의 세움 장식을 세웠다. 금실로 고정시킨 세움 장식은 일견 사람처럼 보인다. 가운데 줄기 양쪽에 가지를 대칭형으로 달았다. 크게 위아래로 하나씩 그리고 가운데 작게 하나다. 마치 팔다리를 벌리고 선 모습이다. 도쿄박물관 오쿠라 콜렉션 가야 금관처럼 이 금관 역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정식 발굴이 아니라 도굴된 것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백제는 금관 없고 관모에 금장식…고구려 영향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으로 가보자. 한강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도읍으로 삼았던 백제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멸망에 가까운 환란을 겪는다. 이후 공주에서 재기에 성공한 백제의 왕릉급 무덤들이 발굴·복원돼 있다. 이 가운데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의 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장자 신원이 밝혀진 고대 왕릉이다. 도굴이 아니라 완벽하게 발굴된 덕분이다.

신라나 가야에서 출토되는 금관이 여기서도 나왔을까? 무령왕릉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관모(冠帽)에 다는 화염무늬 금장식(국보 154호, 155호)이 출토됐다. 국보 154호는 무령왕, 국보 155호는 왕비 금장식이다. 금관 대용품으로 볼 수 있는 금장식을 왕만이 아니라 왕비도 똑같이 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관모 금장식의 기원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나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북사(北史)』, 『수서(隋書)』등에서 백제의 복식과 관모가 고구려 풍습과 같다고 적는다. 그렇다면 이제 고구려의 관모 금장식 풍속은 어땠는지, 금관은 있었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 무령왕 관모 화염무늬 금장식과 왕비 화염무늬 금장식. 국립공주박물관. ⓒ 김문환

고구려 금관, 만주 집안박물관 전시 

발길을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시로 돌린다. 2대 유리왕부터 19대 장수왕 15년 427년까지 고구려 수도이던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고구려의 피라미드형 적석총이 산재하고, 여기서 출토된 많은 유물이 집안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구려 적석총은 도굴에 취약한 돌방(石室, 석실)묘로 대부분 훼손됐지만, 박물관 2층에는 금 장신구 같은 고구려 황금 유물이 대거 소장돼 탐방객을 맞는다. 국내에서 신라의 황금유물에만 익숙하던 터라 고구려의 화려한 황금유물을 접하면서 얻는 충격은 자못 크다.

한민족 황금문화의 원조가 고구려일까? 고구려 금관이 혹시 남아 있을까? 용솟음치는 호기심에 1, 2층 전시실을 돌고 또 돌며 2개의 금관 관련 유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2층에 전시중인 금관 장식 일부다. 금관은 훼손됐고, 금관을 이루던 일부 부품이 3개 남았다. 고구려도 금관을 만들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또 하나는 광개토대왕릉(혹은 고국원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에서 출토된 고깔형 금동관의 일부다. 완제품은 아니지만, 고구려에도 금관과 금동관 문화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고구려 금동관, 깃털형태 조우관 금장식 소골

무대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옮겨보자. 만주 집안에서 발굴된 금동관을 전시중이다. 많이 훼손된 상태지만, 관테(臺輪, 대륜)와 그 위에 꼽았던 새 깃털 세움 장식 3개가 남았다. 조우관(鳥羽冠)이다. 중국 역사서를 펼치자. 당나라 이연수가 남북조 시대 북조의 선비족 나라 북위, 북제, 북주, 이어 수나라까지 네 나라 역사를 659년 100권(본기 12권, 열전 88권)으로 정리한 『북사(北史)』 94권 열전 고구려조의 내용을 보자.

▲ 집안 태왕릉. ⓒ 김문환

고구려인들이 고깔(弁, 변) 형태의 절풍(折風)을 쓰는데, 사인(士人,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란 뜻)들은 새 깃털로 장식한다고 적혀있다. 귀인(貴人)들은 비단으로 만든 고깔(弁, 변)에 금장식을 붙이는데 이는 소골(蘇骨)이라는 기록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구려 금동관 유물 잔해는 소골인 셈이다. 소골 풍습이 백제로 전파돼 무령왕릉의 관모 화염무늬 금장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여러 기록과 유물로 볼 때 신라는 4, 5세기 고구려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다룬다). 그렇다면 신라의 금관, 금동관 풍습 역시 고구려 조우관의 절풍과 소골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 고구려 깃털형태 조우관 금장식. 집안출토. 국립중앙박물관. ⓒ 김문환

고구려 영향받은 경상도 새깃털 금동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국립 대구박물관으로 가보자. 경북 의성 탑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신라의 ‘출(出)’자 형 사슴뿔 금동관과 다르다. 신라 금동관과 금관의 기원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의 근거를 제공해준다. 새 깃털 형상 2개를 세움 장식으로 꼽은 금동관. 만주 집안에서 출토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새깃털 조우관과 닮은꼴이다. 이는 고구려 조우관의 새 깃털 영향을 의미한다.

의성은 신라와는 다른 진한(辰韓) 12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조문국의 근거지다. 신라 역시 처음에는 진한 12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진한이나 신라 금관의 근원이 고구려라는 것일까? 백제가 고구려 영향으로 비단 관모에 화염 무늬 금장식을 꼽았다면 진한과 신라 역시 북에서 내려온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가설은 다음 호 유라시아 금관의 기원을 다룰 때 설득력이 더 커진다.

▲ 조우관 형태 새깃털 금동관. 의성 탑리 출토. 고구려 영향. 국립대구박물관. ⓒ 김문환

마한의 금동관에 고구려 양식 화염 무늬

이제 무대를 마한의 중심지 국립나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자. 금관이나 금동관을 만들지 않았던 백제와 달리 전남 영산강 유역 마한 땅 나주 신촌리 9호 고분에서 금동관이 출토됐다. 국보 295호 마한 금동관은 생김새가 기존 고구려 조우관 새 깃털 형태나 신라의 3단 ‘출(出)’자 초화(草花) 형태와 다르다. 화려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금동관이지만, 국보로 지정된 이유가 한눈에 설명된다.

세움 장식은 나뭇가지나 잎사귀의 초화(草花) 무늬를 기본으로 하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화염무늬로 승화되고 마침내 동그란 보주(寶珠) 형태를 띤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화염무늬 금장식의 연장선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일각에서 일제시대 평양 근교 강서군에서 출토한 고구려 금관이라고 주장하는 금관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일명 강서군 금관이 고구려 것이라면 고구려도 화염무늬 금관을 제작했고, 남방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금관, 금동관, 관모 금장식의 기원은?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민족 금관과 금동관을 정리해보자. 먼저, 구조적으로 도굴이 어려운 5세기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한 금관 6개와 각지의 금동관은 나뭇가지를 상징화한 출(出)’자 초화(草花)형 세움 장식과 사슴뿔 세움 장식을 쓴다. 둘째, 가야의 금관 역시 단순하지만, 나뭇가지를 모티프로 한 초화(草花)형 세움 장식이다. 셋째, 새깃털을 원용한 고구려 조우관 형태 금동관이 초기 경상도 지역 금동관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넷째, 금관이나 금동관을 만들지 않은 백제 무령왕 관모의 화염무늬 금장식과 마한의 화염무늬 금동관 역시 고구려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 국보 295호 마한 화염무늬 금동관. 나주 신촌리 출토. 국립나주박물관. ⓒ 김문환

결국 고대 한국의 금관, 금동관 문화의 출발점이 고구려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황금문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초기 신라 교동금관에 나타나지 않던 사슴뿔이 신라 금관과 금동관 전성기인 5세기 등장한 이유와 맞물린다. 사슴은 농경문화가 아니다. 유목 생활, 수렵 생활의 상징이다. 기마민족, 수렵민족과 연결된다. 다음호에 자세히 다룬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가운데 금관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 8개(신라 6개, 가야 2개)를 비롯해 여러 금동관의 특징과 기원을 짚어본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금관문화를 현장유적과 박물관 유물취재를 통해 문명교류 관점에서 5회에 걸쳐 들춰본다.

편집 :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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