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의 통계이야기] ⑨

▲ 이재형 박사

물가통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가 또는 가격의 변동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대가가 바로 가격이다. 사회에서는 수많은 상품과 서비스가 거래되는데, 그 가격을 종합적으로 측정한 것을 물가라 한다. 곧, 가격은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의 대가이고, 물가는 이러한 가격들을 종합한 지표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물가 변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가격 변동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물가통계 기초인 '동일한 상품'이라는 가정

가격 변동이란 ‘동일한’ 상품이나 서비스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변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간의 경과 속에서 ‘동일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얼마나 존재할까? 기존 사업자가 사업을 그만두기도 하고, 새 사업자가 들어오기도 한다. 또 계속 사업을 하는 사람도 사업 내용을 바꿀 수 있다. 한 달이나 일년처럼 비교적 짧은 기간이라면 ‘동일한’ 상품의 대가, 곧 가격을 조사할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5년처럼 긴 기간이라면 ‘동일한’ 상품이 존재할까?

▲ 동네슈퍼에서 파는 라면과 대형슈퍼에서 파는 라면은 물가통계상 '동일한' 상품이 아니다. © MBC

대학에 다니며 자취생활을 하는 이철수군은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전에는 동네슈퍼에서 어떤 라면 한 봉지를 500원에 샀는데, 근처에 대형 슈퍼마켓이 생기는 바람에 동네슈퍼는 장사를 그만두었다. 새로 생긴 슈퍼마켓에서는 같은 라면 한 봉지를 450원에 판다. 그러면 라면값이 내린 것인가? 동네슈퍼에서 파는 라면과 대형슈퍼에서 파는 라면은 ‘경제학적’으로는 다른 상품이다. 그러므로 이군이 라면을 구입하는 부담은 줄었지만 라면 가격이 변동된 것은 아니다.

물가는 오르지 않아도 지출은 커지는 '모순'

이런 사례는 소비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이다. 김상수씨는 젊을 때는 박봉으로 겨우 살림을 꾸려나갔다. 어쩌다 한번 집 근처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회사에서 승진도 했고 봉급도 올랐으며, 집도 장만하여 살림이 상당히 넉넉해졌다. 가족들과 외식을 자주 하는데, 값이 좀 비싸지만 시설도 좋고 맛도 있는 좋은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사 먹는다. 그때마다 그의 부인은 삼겹살값이 너무 올랐다고 불평한다. 과연 삼겹살값이 올랐는가? 전에 다니던 삼겹살집과 요즘 다니는 고깃집에서 파는 삼겹살은 서로 다른 상품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비교해 가격이 변동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양의 삼겹살을 먹고도 김상수씨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많아졌지만, 이것을 물가 탓이라고 볼 수는 없다.

김씨 부인은 전에는 동네에서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했다. 그 미장원이 폐업하고 좋은 시설을 갖춘 미장원이 들어섰는데, 그 대신 요금이 전보다 훨씬 비싸졌다. 싼 미장원이 있으면 그리로 가고 싶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할 수 없이 새로 생긴 미장원에 간다. 그 부인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이 역시 가격이 오른 것은 아니다. 위 세 가지 사례는 ‘경제학적’으로는 모두 가격 변동이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통계조사 현실에서는 가격 변동으로 조사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업체를 계속 조사대상으로 유지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물가통계에 꼼수를 쓴 사연

가격 변동을 ‘동일한’ 상품의 대가 변동이라는 정의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말까지 만성 물가폭등에 시달렸고 정부는 늘 뛰는 물가를 잡으려 고심했다. 현실의 물가상승은 어쩔 수 없으니 통계지표상으로나마 물가상승률을 낮추려고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비자물가 통계에서 담배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정부는 담뱃값을 올리더라도 이것이 물가통계에 반영되지 않게, 기존 담배가격을 올리는 대신 새로운 비싼 담배를 내놓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 담뱃값은 지표상으로는 안정된 대신 새로운 고급담배가 수시로 등장했다. 아리랑, 파고다, 신탄진, 청자, 은하수, 한산도, 거북선, 태양, 솔, 디스 등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고급담배의 역사 뒷면에는 물가통계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정부의 꼼수가 숨어있었다. 물론 정부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지만, 대다수 언론이나 국민들은 그렇다고 확신했다.

▲ 과거 정부는 담뱃값 인상이 물가통계에 반영되지 않도록 수시로 새 담배를 출시했다. © 문경시청 블로그

라면이나 삼겹살 같은 것은 그래도 비교적 상품의 동질성이 큰 것이다. 신사복, 곧 남자용 정장을 예로 들어보겠다. 의류업체마다 다양한 종류의 정장을 내놓지만 길어야 1년, 짧게는 몇 달 만에 그 상품은 없어지고 다른 제품을 내놓는다. 유행에 민감한 여성복은 더 심하다. 이럴 때 과연 ‘동일한’ 상품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전자제품 등은 도대체 같은 상품이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다양한 규격과 모델이 있다. 얼핏 보면 간단할 것처럼 보이는 물가통계도 실제 그 작성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경제학적’으로는 ‘동일한’ 상품이라 보기 어려운 경우라도 통계조사 현실상 어쩔 수 없이 동일한 상품으로 간주하고 통계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때도 많다.

가격을 조사할 때 한 상품에도 수많은 모델이 있어 무엇을 조사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즉석 면만 하더라도 라면, 짬뽕, 자장면 등 다양한 종류가 있고, 라면만 하더라도 신라면, 열라면, 삼양라면 등등 수많은 상품이 있다. 삼겹살도 국내산과 외국산이 있으며, 국내산 가운데도 제주흑돼지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가까운 동네 횟집에 가면 광어, 우럭, 돔 등 각종 생선회 요리가 있는데, 같은 생선일지라도 소, 중, 대, 특대 등 크기별로 여러 종류가 있다. 회 가격을 조사한다면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가? 만약 어떤 횟집에서 모든 가격을 5,000원씩 인상했다면, 생선 종류와 크기별로 가격상승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가통계 조사를 할 때 이 모든 것을 모두 조사해야 하는가?

기차요금을 올릴 때 쓴 정부의 꼼수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조사할 때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델과 규격을 모두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통계조사의 효율성을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별로 대표 상품이나 대표 서비스를 정하고 이들 대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 변동을 기준으로 물가통계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물가가 크게 올랐다고 하더라도 대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변하지 않았다면 통계상으로 물가가 오르지 않은 것으로 된다.

과거에는 이러한 원칙을 악용하여 정부가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기차요금은 기본요금+거리요금으로 구성되는데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차요금을 조사할 때는 기본요금을 대표요금으로 삼았다. 그래서 정부가 기차요금을 올릴 때 기본요금은 그대로 두고 거리요금만 올리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철도요금은 올랐지만 물가통계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철도요금 통계작성 방식에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자 통계청은 기본요금과 거리요금을 모두 반영하는 방식으로 대표요금 체계를 바꾸었고, 그제야 그런 꼼수가 사라졌다.

조사대상 업체를 비밀에 부치는 이유

요즘에는 그런 일들이 없으리라 믿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자체들이 통계청 지방사무소에 물가통계 조사대상 업체를 알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방 물가상승률은 지자체장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였기에 지자체들이 물가통계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유인이 있었다. 지자체가 조사대상 업체를 알게 되면 업체를 찾아가 물가통계 대상품목은 가격을 올리지 말아 달라는 ‘협조요청’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음식숙박업과 개인서비스업 등에는 지자체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들 업체는 ‘협조요청’을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취급하는 수많은 상품 중 한두 개, 식당이라면 설렁탕, 짜장면 등만 조사대상이어서 업체들이 그 요청을 들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물가통계를 낼 때 조사대상 업체의 소재 자체가 엄격한 비밀에 부쳐졌다.

다른 통계보다 유독 물가통계에 정부나 지자체가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가 많았던 것은 이 통계가 그만큼 국민들에게 민감한 통계지표였고, 정부의 성과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직접적인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가통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 이런 꼼수들은 우리나라 통계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과거 정부가 통계에 영향을 미치려 한 시도가 적잖이 있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면이라면, 권위주의 정권조차도 직접 통계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건전한 공론장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공론장이 건전해지려면 객관적 현실 인식을 공유해야 하며 그 바탕이 되는 게 통계다. 통계가 흔들리면 정책도 여론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가짜뉴스도 통계 왜곡에서 출발한다. 언론인은 통계 해석을 잘못하면 ‘사회의 공적’이 될 수 있지만 잘하면 ‘해석특종’을 할 수 있다. 통계전문가인 이재형 박사가 통계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들을 풀어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일하는 그는 <국가통계시스템발전방안> <한국의 산업조직과 시장구조> 등 많은 연구와 저술을 해왔고 통계청 통계개발원장을 역임했다. [편집자]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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