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조현아 PD

‘제로레이팅(Zero-rating)’은 콘텐츠 사업자가 이동통신사와 제휴해 이용자의 데이터 이용료를 면제하거나 할인해주는 제도다. 이용자가 데이터를 써도 그 비용을 이통사나 콘텐츠 제작사가 대신 납부하기 때문에 ‘0원 요금제’라 부른다. 작년 포켓몬고 열풍이 불 때, SKT가 제로레이팅으로 앱을 제공해 280TB 데이터 비용을 이용자에게 물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방통위는 제로레이팅이 통신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고 보고 허용 방침임을 밝혔다. 이미 3대 통신사는 각각 게임 등 업체와 제로레이팅 계약을 맺었다. 소비자 인식조사에 따르면 75%가 제로레이팅 관련 규제를 반대한다. 이용자는 공짜로 데이터를 쓰고, 콘텐츠 업계는 이용자를 대거 유치하며, 통신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수익을 보전한다고 하니 얼핏 보면 모두가 이득을 얻는 듯하다.

▲ SKT는 포켓몬고와 제로레이팅을 맺고 280TB.총 43억에 달하는 데이터 비용을 물지 않았다. ⓒ 포켓몬컴퍼니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제로레이팅은 ‘누군가는 분명히 비용을 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정확한 계약 조건은 알 수 없어도 이용자가 내지 않은 비용을 통신사든 콘텐츠 회사든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포켓몬고의 데이터 비용은 43억원에 이르렀다. 이 비용은 누가 부담했을까? 이용자는 지불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용자 개개인에게, 나아가 시장 구조나 산업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주는 일이 일어난다.

통신사가 비용을 스스로 부담한다고 할 때엔, 이용자 간에 불평등한 비용 전가가 발생한다. 포켓몬고를 제로레이팅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 포켓몬고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다른 SKT 고객들은 통신사 요금을 내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낸 요금으로 ‘포켓몬고’ 데이터 비용을 벌충해주는 셈이 된다.

모바일 콘텐츠 기업이 데이터 비용을 부담한다고 할 때도 차별은 마찬가지다. 콘텐츠 기업의 수익 창출에는 모든 이용자가 동일한 기여를 한다. 하지만 제로레이팅 계약을 맺은 특정 통신사 고객만 이득을 볼 뿐, 다른 통신사 고객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일종의 ‘서비스 불균형’이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콘텐츠 기업이 데이터 비용 보전을 위해 콘텐츠 사용료를 올리기라도 한다면 애꿎은 이용자가 부담을 나눠 져야 한다. 공짜 데이터 비용을 광고를 통해 보전하려 하거나, 그에 따라 콘텐츠 질이 떨어질 때도 이용자는 이를 감내해야 한다. 누군가 대신 비용을 내줌으로써 이용자는 제로레이팅 서비스에 ‘종속’되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 비용을 내주는 방식’은 나아가 산업 생태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제로레이팅은 주로 거대 통신사와 대량의 고객 유치를 위한 데이터 비용을 감당할 만한 자본이 있는 콘텐츠 회사 사이에 이뤄진다. 이들의 결합이 일정 수준 이상 시장지배력을 갖게 되면 독과점을 형성한다. 실제 11번가 관계자는 과거 인터뷰에서 “모바일 데이터 프리를 적극 시행해 SKT 소비자에게 부담 없는 모바일 쇼핑 환경을 구현한 것이 시장 1위를 차지한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시장지배력 남용을 시인한 셈이다. OTT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KT 이용자의 45.9%가 올레TV 모바일을 쓰고, LG유플러스 고객 47.5%가 비디오포털을 쓴다. 제로레이팅 앱이기 때문이다. 모바일 시장 지배력이 다른 콘텐츠 시장 지배력까지 결정짓는 구조다.

‘누군가 대신 비용을 내주는 0원요금제’가 독과점을 형성하면, 가능성을 지닌 많은 중소기업, 스타트업이 시장에서 퇴출된다. 공짜 데이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장지배력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는 “제로레이팅이 활성화하면 ‘무료 메신저 카카오톡’ 같은 혁신적 기업은 탄생하기 어렵고 스타트업은 매출 3분의 1을 전용회선료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안정적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제로레이팅에 기반한 독과점 구조는 콘텐츠 시장 전체의 다양성과 혁신을 막고, 장기로는 소비자의 편익도 저해할 수 있다. 통신사 과점으로 경쟁이 제한적인 한국에서 독과점 구조가 뚜렷해진다면 각종 공정거래 위반 행위가 빈번해지고 중소 벤처기업은 쉽게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

▲ 특정 통신사에서 특정 앱을 쓰면 데이터가 공짜라는 제로레이팅. 그 데이터 요금은 진짜 0원일까? ⓒ 11번가

정부는 일단 제로레이팅을 허용하되, 불공정 경쟁 혹은 사용자 이익 침해가 있을 경우 ‘사후에 규제하는 방식’으로 방침을 정했다. 유럽연합과 영국에서 제로레이팅 관련 상시 모니터링 제도를 운영하면서 사후 규제 방식을 택하는 추세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오늘>이 지적했듯 유럽에서도 네덜란드는 제로레이팅을 금지하는 등 국가마다 시장상황은 다르다. 제로레이팅으로 불공정 경쟁이 현실화하고 독과점이 심해진다면 사후 규제로 어디까지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통신사들의 불법마케팅 후 사후규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이었던 전례들에 비추어 그 실효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제로레이팅은 단기로는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에게 편익을 가져다 주는 듯 보이지만, 누군가 대신 비용을 내야 하는 구조여서 이용자에게 의도치 않은 대가 지불을 요구한다. 이용자 간 불평등, 공정경쟁 와해, 전체 소비자 이익 침해는 이용자들이 원치 않는 결과다. ‘0원 요금제’는 ‘0원’이 아니다. 정부는 제로레이팅 허용 방침을 재고해야 한다.


편집: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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