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왕따’

▲ 조현아 PD

초등학교 4학년, 나는 점심시간이 가장 싫었다. 누가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줄지 항상 눈치를 봐야 했던 탓이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 꼬박 5시간 정성스레 그린 만화 캐릭터를 선물한 적도 있다. 그림을 받은 친구는 머뭇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함께 밥을 먹으러 가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 또 외톨이가 됐다. 삼삼오오 모여 재잘대고 별 것 아닌 일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점심시간이 내게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늘 눈에 띄지 않게 ‘혼밥’을 먹었던 나는 ‘왕따’였다.

인간 뇌 속에는 수많은 서랍장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서랍 중 하나에 넣어버린다고 한다. 수없이 쏟아지는 복잡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자신만의 분류군을 만들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와 피부색이 비슷한 누구, 머리가 길고 상냥한 누구… 세상에 태어나 나와 남을 구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뇌는 더 남을 관찰하며, 세분화한다. 연령, 성별, 민족적 배경, 사회적 계층, 장애 유무… 그 하위 범주는 점점 더 세밀해진다.

일단 서랍장을 나누듯 개별적 특성이 정해지면, 항상 ‘우리들’과 구분되는 ‘타인’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친구, 함께 밥을 먹는 친구 등. 나는 또래 친구들에게 ‘함께하고 싶지 않은 친구’로 분류된 아이였다. 어쩌다 나는 ‘우리들’이 아닌 ‘타인’에 속하게 된 것일까? 깊게 생각하고 곰곰이 이유를 따져 보아도 따돌림받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특별하다 할 ‘거창한’ 이유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피부가 까매서, 몸이 통통해서, 매일 비슷한 옷을 입어서…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웃는’ 것뿐이었다. 누군가 눈이 마주쳤을 때, 또는 그 누군가와 뭔가를 함께 하기 위해 난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그것은 내게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는 어색한 웃음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미소는 약자가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고. 서열이 낮을수록 당신에게 나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자 하고, 혹시나 모를 상대의 거부감을 막아보려 하기에 미소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내 사진을 보면, 분명 웃고 있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진짜 감정으로서 웃은 게 아니라, 하나의 생존 수단으로 나는 가짜 웃음을 지었다.

꼭 4학년 때, 교실이라는 특정 공간 속 ‘나’의 얘기만은 아니다. 시야를 넓혀 사회라는 총체적 구조 안에서도, 웃어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의 얘기는 많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백화점이나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는 노동자들은 일반인보다 12배 공황장애, 3.5배 우울증을 겪는다고 한다. 고객이 폭언 해도 본사 관리직 눈 밖에 날까 봐 웃으며 억지로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12시간 서서 일하는 동안, 눈치 보며 쉬지 못했고 고객과 본사 양쪽으로부터 갑질을 당해야 했다.

백화점 판매원, 플랫폼 노동자, 남성 중심 기업 속 여성 사무직, 청각장애인,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 경제적으로 소외받고, 사회구조적으로 소외받으며, 차별과 배제로 따돌림당하는 이들은 웃어야 한다. ‘웃음’은 사회에서 소외받는 약자들의 언어다. 자신에게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낮은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소외와 차별의 맥락 속에서 그들은 애써 웃는다.

▲ 우리 사회에는 웃어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다양한 맥락의 '차별과 배제'에 놓인 이들이 그렇다. ⓒ pixabay

사실 인간이 누군가를 싫어하고 차별하며 따돌리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어떤 낙인이나 딱지가 붙으면 바로 네 편 내 편을 가르고자 하는 게 인간 본연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각종 심리학 실험에서 확인된 인간의 ‘편 가르기 본능’이다. 뇌과학자 장동선은 “집단 사고와 따돌림에는 아무런 근거도 필요하지 않다, 남들이 ‘남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너’가 ‘우리들’에 속하지 못하고 ‘타인’으로 남는 이유는 그냥 너가 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소득층, 여성,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그들이 ‘그들’로 남는 이유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향한 불합리한 지배적 시선에 어찌 합리적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받는 차별과 배제, 따돌림의 이유를 납득할 만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웃음은 타인에게 ‘적의 없음’을 전달하는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지금 웃고 있는 모두가 ‘진짜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웃음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앙리 베르그송은 ‘악의 없는 잘못이나 사소한 실수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따뜻한 징벌’로 웃음의 구조를 풀어냈다. 네가 잘못했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 괜찮다고, 웃으며 포용하는 속뜻이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지어야 했던 웃음은 늘 어색하고 불편했다. 우리 사회 웃음이 약자가 지니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다수가 먼저 다가가는 따뜻한 ‘포용’의 수단이 될 수는 없을까? ‘타인’을 영원한 타인의 서랍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뇌 속의 서랍장을 허물며 타자를 부드럽게 포용할 수 있는 ‘웃음’을 생각해본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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