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② 한반도 정세 변화와 한국 민주주의 역사

▲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AP <연합뉴스>

“이 사진 여러분도 보셨습니까? 당대 젊은이로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저는 20대부터 30년 넘도록 통일을 부르짖고, 조미수교를 주장하던 사람인데 막상 이 모습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상상이 잘 안 되던 장면이거든요. 김일성도, 김정일도 아닌 김정은이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겁니다.”

지난해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해빙기에 접어들자 북미관계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월 29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중간선거 지원유세 중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개선된 북미관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언급하며 “우린 사랑에 빠졌다”(We fell in love)고 고백했다. 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두 번째 주제로 ‘한반도 정세 변화와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강연했다.

남북문제 안과 밖에서 함께 노력해야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합니다. 지금 한반도는 굉장히 중요한 변화의 시점에 있습니다. 어렵게 주어진 기회를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부리를 쪼아대듯, 어미닭이 이를 듣고 밖에서 쪼아주듯 모두의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교수는 “한국 역사에서 그동안 좋은 기운이 모아진 적이 없다”며 “촛불 덕분에 평화로 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은 공식수행원 14명, 특별수행원 52명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 특히 한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있는 능라도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을 상대로 연설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우리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포함해서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북미간 회담이 계속 잘 성사될지 모르겠지만 조미수교가 이뤄질 때까지 우리가 잘 지켜봐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남북관계를 개선해보려고 시도했으나 대내외적으로 엇박자가 이어졌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를 보면 이들이 추구하는 북한 기조와 정반대 정부가 한국에 들어섰다.

근현대사와 함께 엇갈린 남북관계

▲ 한홍구 교수는 30년간 엇갈려온 남북관계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 박지영

“1994년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상황이었죠. 그때 카터 전 대통령이 클린턴을 만류했어요. 사망자가 미군만 해도 50만, 전쟁 치르고 나면 남북한 최소 300만이 죽을 거라고 예상한 거죠.”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일성 국가 주석과 만났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서방국가에서 전직이긴 하지만 대통령급이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상대방이 매로 치면 우리도 매로 답하고, 떡으로 치면 우리도 떡을 내놓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늘 강조한 말이다. 카터 전 대통령이 클린턴에게 북한을 향한 폭격 중지를 요청하자 김일성 주석도 핵개발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더 나아가 카터 전 대통령은 남북화해를 중재했다. 그러나 평화의 길은 멀어져 갔다.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기로 한 시기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한국에는 전국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김일성이 자연사로 죽었는데 왜 전국비상경계령을 내렸을까요?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일각에서는 평양으로 조문단 보내야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수구세력이 반대했죠. 국민들이 차려놓은 김일성 분향소에 경찰이 와서 짓밟을 정도였으니깐.”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됐다. 한 교수는 “김영삼 정부를 보내고 김대중 정부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때 미국에서 대통령으로 부시가 당선됐다”며 한반도의 어긋난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몰아붙였다. 그때 남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할 의지와 능력을 갖춰도 이뤄질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부시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미국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이때 한국 정부는 보수세력인 이명박과 박근혜가 연이어 집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촛불의 힘으로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죠. 근데 또 미국 대선이 있었어요. 통일운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힐러리가 당선되길 고대했지만 트럼프가 당선됐죠. 어떻게 이렇게까지 엇박자가 날 수 있나? 한국과 미국의 시계가 이토록 안 맞을 수가 있나 했죠. 그때 누군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어요. ‘트럼프가 천하의 또라이인데. 김정은과 회담한다고 하는 거 아니야?’”

태극기 집회에서 만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

▲ 한국전쟁 중에 보도연맹 회원들이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됐다. 이 현장에서 발견된 유해 위에 새싹이 자라나고 있다. ⓒ 평화박물관

1960년에 이승만 독재 정권을 종식하기 위해 4.19혁명이 일어났다. 한 교수는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나라 가운데 일어난 첫 번째 시민혁명이 4.19였다”고 소개했다. 4.19혁명은 중고등학생이 주축이 돼 일으켰다. 이들은 해방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해 일제식민지 노예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58년 전에 이미 혁명이 일어났는데 한국 민주주의는 왜 발전하지 못하고 6월 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촛불집회 등이 계속 일어났을까요? 이유를 4.19세대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지금 4.19세대 어디가면 볼 수 있죠? 태극기집회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일제 군국주의 대신 미국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첫 세대, 그리고 한글로 교육 받은 첫 세대가 바로 4.19혁명을 일으킨 주역이다. 전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낸 이들이라고 불린 세대가 어쩌다 태극기집회에 나가게 됐을까? 한 교수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척박해진 환경 때문에 이들이 변질됐다고 설명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것이 그 이유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들끼리 손잡아주는 거예요. 살다 보면 유혹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자신한테 물어봐야 해요. 두 번째는 여러분 자신을 지켜줄 친구입니다. 4.19세대를 태극기집회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한 교수는 “촛불세대의 미래도 이와 같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날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세대가 30년 뒤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한 교수는 “4.19세대처럼 되지 않으려면 촛불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처음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젊은 시절의 자신과 계속 대화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0년대 광주는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

▲ 1980년 광주의 모습을 묘사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네이버

“1980년 광주에서 5월 18일보다 5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지는 새벽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전두환 정부에서 탱크 끌고 오기 직전, 도청에 있던 3만명이 대부분 집에 돌아갔을 때. 끝까지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던 걸까요?”

한 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규정한 사건으로 ‘5.18광주민주화항쟁’을 꼽았다. 도청 앞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시내에 나가 호소했다.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이들의 외침이 잦아들자 진압이 시작되고 총소리가 들렸다.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긴 소리였다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살아남은 죄를 간직한 사람들. 한 교수는 당시 서울에 살았으면서도 부채감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 중 하나다. 지난해는 6월항쟁이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한 교수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6월 항쟁을 ‘5월 달에 집에 간 사람들이 6월 달에 다시 나와 싸운 것’이라고 정의했다. 1980년 5월에서 1987년 6월까지를 이르러 비유한 말이다.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죽어간 분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까지 달라지게 할 수 있어요. 현재를 바꾼다는 것은 우리 삶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분들의 삶도 달라지게 하는 겁니다.”

87년 6월 항쟁의 실패가 말해준 것

전직 대통령을 4명이나 감옥에 보낸 나라. 한 교수는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전두환은 탱크 몰고 나왔지만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우리가 투표로 뽑은 것”이라며 “역사를 바로잡는 것보다 처음부터 대통령을 잘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렀다.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거대 보수세력은 6월항쟁의 실패로 만들어진 거예요. 기회를 놓치면 축구에서 꼭 역습당하죠. 그동안 우리가 힘들었던 건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 번의 기회에도 골을 넣지 못해서입니다. 87년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반토막 났어요. 역사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요.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돼요? 다리가 후들거려 더는 뛰지를 못하는 거예요.”

한 교수는 “적폐가 이명박근혜 정권 때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며 “이미 과거 정권 때부터 척결되지 못해온 과제가 적폐가 된 것”이라고 역설했다. 앞선 이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다 능사로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문재인 대통령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 대해 귀띔했다. 하나는 촛불시민, 또 하나는 실패의 경험이다.

객체 아닌 주체로서 역사 만들어 가는 사람 돼야

▲ 한홍구 교수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들추었다. ⓒ 박지영

“세월호 사건을 보면 선장이 배를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갑니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전쟁 나고 도망가 버리죠. 대한민국은 진즉에 침몰했어야 해요. 그런데 기우뚱기우뚱 하면서도 앞으로 계속 가고 있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두 시민들 덕이에요.“

세월호가 침몰하자 선장은 도망갔지만 제일 나이 어린 22살 여승무원은 끝까지 배에 남아 승객들 구조를 돕다 변을 당했다. 미수습자 9명 중 2명이 단원고 선생님이다. 마지막까지 학생들 찾느라고 깊이 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1980년 5월 도청 앞에 남은 사람들도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이들 모두가 촛불시민이었던 셈이다. 5월 달에 집에 갔다가 6월 달에 다시 광장으로 나와 역사를 만든 사람들. 우리가 오늘 보낸 하루가 내일의 역사다. 한 교수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역사를 공부하는 객체가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역사를 말할 때 역사가 진보한다고 이야기하기 참 힘들었어요. 이명박근혜 정부 때는 사실 역사가 퇴보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역사가 진보한다고 해도 대중이 다 쉽게 받아들여요. 왜냐면 우리가 그 진보를 만들어 내고 경험했으니깐. 그러나 이럴수록 역사 공부를 바로 해야 합니다. ‘진보하는 역사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역할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운현 이상수 한홍구 정희준 박창식 김필동 장승구 이주헌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안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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