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조승진 기자

“우리나라 최고법은 헌법이 아니라 ‘국민정서법이다.” 몇 달 전 세상을 등진 노회찬 의원이 한 말이다. 국회의원에게는 이롭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해로운 입법을 할 때, 이 말은 정당성을 얻는다. 소위 주인-대리인 문제다. 특히 법 적용 과정에서 ’사법불신‘이 팽배할 때, 이 말은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사법부가 권력과 권력형 기업인 등을 이해할 수 없는 감싸주기로 일관하는 때도 그렇다. 

‘국민정서법’은 명문화해 있지는 않지만, 당사자의 행위를 일정하게 강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수 유승준 입대 거부 사건이 그 예다. 그는 미국시민권을 획득해 입대를 거부했다. 아직도 그는 입국 금지 조처를 당하고 있는데, 그의 행위가 국민 정서를 깊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후 그의 국내 연예 활동도 끝장났다. 십 년도 더 된 사건이지만 그는 지금도 ’연예인 군대’ 관련 이슈만 불거지면 대표 사례로 거론되며 비판받는다. ‘유승준 사건’ 이후 남자 연예인이 병역 의무를 회피했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 “우리나라 남자 연예인 군복무는 유승준이 다 시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가수 유승준이 입대 비리 해결사 역할을 했다면 래퍼 마이크로닷은 빚쟁이들 빚 갚는 데 큰일을 하고 있다. 그의 부모가 몇 십억 원 빚을 지고 해외로 도피한 사건이 요즈음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여섯 살에 불과했고 부모의 범죄를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여론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기꾼 아들이란 주홍글씨를 붙이고 도의적인 책임을 다 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부모님을 대신해 사과하고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지만, 비난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그간 연예인 부모에게 돈 못 받은 빚쟁이들이 ‘빚투 운동’을 통해 속속 등장했다. 이들은 돈 잘 버는 연예인 자식이 부모 대신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배우 차예련, 가수 비, 래퍼 도끼, 걸그룹 멤버 휘인이 ‘빚투 운동’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법적으로는 ‘부모 빚’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만 이들은 논란이 일자 ‘부모 대신 빚을 갚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론이 조성한 ‘도의적, 사회적 책임’은 ‘법적 책임’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 '빚투 운동'으로 연예인 부모에게 돈 못 받은 빚쟁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 MBC <섹션TV연예통신>

윗세대 잘못을 아랫세대가 대신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는 ‘한일 위안부 협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일본이 배상한 돈으로 만든 ‘화해치유재단’ 해체를 결정했다. 그간 피해 당사자들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대학생 동아리 ‘평화나비’는 지난 정부가 일본정부와 체결한 협상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문 대통령의 결정은 이들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과 평화나비는 일본 정부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제대로 된 배상을 하라고 요구한다. ‘도의적·사회적 책임’을 보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정부는 ’법적 책임‘을 다했다며 선을 긋는다. 일본 국민 중에는 “왜 윗세대가 한 일을 우리에게 따져 묻느냐”는 반응도 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정서’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을 법리적으로 접근하면 우리가 불리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 박근혜 정부가 이미 명문화한 합의문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교문서는 한 번 체결되면 쉽게 파기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일본과 맺은 합의 협약이 불합리하다면서도 파기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는데, 외교협약을 번복하면 국제사회에서 국가 신뢰 하락과 더불어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렵다. 미디어가 나서야 한다. 불합리한 합의 내용과 적절치 못한 일본 정부의 배상 태도, 그리고 당시 고통받은 위안부의 처절한 삶을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위안부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한류와 함께 퍼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 세계인의 마음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모인다면 ‘국제정서법’도 우리 편이 될 것이다. 국제사회가 입을 모아 ‘도의적·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날에는 일본 역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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